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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9-24 12:18
[기타] 일제시대 당시 한국 물리학자들
 글쓴이 : 붉은kkk
조회 : 2,982  



조응천(曺應天)
1895(고종 32)∼1979. 통신공학자·군인·교육행정가. 용열(用悅)의 장남으로 평안북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뒤 미국 트로이주립대학 토목과, 퍼두커대학 물리학과, 그리고 인디애나대학 대학원에서 수업한 뒤 그 대학원에서 〈3극진공관의 출력조건〉이라는 논문으로 1928년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뒤 기독교청년운동에 참여하면서 《농민생활》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하여 농민교육에 힘썼다. 광복 후에는 군정청 경무부 통신국장, 건국 후에는 육군통신학교장과 통신감을 거친 뒤 1956년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1957년 체신부차관에 취임한 뒤 한국동란으로 파괴된 통신시설 복구에 공을 세웠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동국전자고등공업학교 기술고문, 동국전자공과대학 명예학장, 광운전자공과대학 학장, 전자공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는 전기통신공학에 관한 서적 외에도 일반교양과학서적인 《백만인의 원자학》·《백만인의 인공위성》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최규남(崔奎南)
1898∼1992. 물리학자·교육자·행정가.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동운(東雲). 서울출생.
1926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를 졸업하고 학교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던 베커(Becker, J.) 교수의 추천에 의하여 이듬해 미국 오하이오주의 웨슬리안대학에 유학하여 1929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미시간대학으로 옮겨 물리학을 전공, 1933년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바로 귀국하여 모교에서 조교수, 교수를 거치며 물리학을 국내에 보급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광복과 함께 경성대학 이공학부 부장대리로 자리를 옮겼고, 서울대학교로 개편되면서 동대학 교수가 되어 초기의 물리학교육에 진력하였다.
특히 광복 당시 한국인 가운데 물리학에서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은 단 2명뿐이었고, 그 가운데도 한국 최초의 박사학위 취득자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물리학계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1952년 피난수도 부산에 있던 서울대학교 본부에서 한국물리학회 창립대회가 열리자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이었던 그는 첫 물리학회 회장에 선출되어 1960년까지 그 일을 맡아보았다.
광복과 함께 과학계의 인력이 거의 없던 풍토에서 바로 과학행정에도 종사하게 되었고, 1948년 문교부 초대과학교육국장을 거쳐 1950년 문교부차관, 1951년 서울대학교 총장, 이어 1956년 문교부장관을 역임하며 과학행정의 앞장을 섰다.
특히 1949년 10월 과학교육국장 재직시 제1회과학전람회를 개최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의 지원 아래 1950년 과학기술원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그가 주역을 담당하였던 최초의 이 종합과학기술연구기관은 6·25로 없어져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뒤 1964년에는 한국과학기술원(KIST)의 설립준비위원장이 되어 주도적 활약을 하였다.
그뒤에도 경제과학심의회 상임위원(1964), 학술원 종신회원(1966),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명예회장(1967) 등을 거치며 한국과학계의 대부 구실을 하였다.
저서로는 《원자》·《당신과 원자력》·《동운논집 東雲論集》 등이 있다. 〈朴星來〉



박철재(朴哲在)
1905∼1970. 물리학자·과학행정가. 연희전문학교 수물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오랫동안 X선회절법을 이용하여 고분자의 구조를 연구,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8·15광복과 더불어 귀국한 뒤에는, 우리나라 과학기술교육과 연구소설립에 힘썼다.
특히, 건국과 더불어 문교부 기술교육국장에 있으면서 원자력의 평화적인 이용을 위한 기초연구소를 설립하기 위하여 기술교육국에 원자력과를 신설하고, 원자력연구에 필요한 연구요원 양성을 위하여 많은 학자들을 해외연수하게 하였으며, 한·미쌍무협정에 따라 원자로를 도입, 이를 전담할 기구로 원자력연구소를 건립, 초대연구소장에 취임하였다.
그뒤 인하대학의 학장으로도 있었으며, 학술원 회원과 한국물리학회 명예회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가 남긴 업적 중 가장 큰 것은, 고무가 모든 물질 중에서 가장 탄성(彈性)이 큰 이유를 분자구조에서 규명한 것이라고 하겠다.
생전의 이와같은 업적으로 문화훈장 국민장과 학술원 공로상을 받았으며, 죽은 뒤 문화훈장 모란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휘소(李輝昭)
1935∼1977. 이론물리학자. 서울출신. 학계에서는 밴자민리(Benjamin, W. Lee)로 알려져 있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물리학에 뜻을 두어 3학년 때인 1954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마이애미대학 물리학과에 입학, 이 과를 졸업하고, 25세 되던 1960년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K이온 중간자와 핵자 상관현상의 이중분산표식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듬해 모교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조교수가 되었고, 1964년 프린스튼고급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1965년 펜실베이니아대학 정교수가 되었다.
1966년 뉴욕주립대학교로 옮겨 그곳에서 중국계 양첸닝(楊振寧)과 함께 연구하였고, 1968년부터 1년 동안 파리대학교 교환교수로 있다가, 1969년부터는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Fermi National Accelerater Laboratory) 이론물리학연구부 부장 겸 시카고대학 교수로 있었다.
입자물리학 분야에서 폭넓은 연구를 하였으며, 특히 1965년경부터 SU(6)이론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에 물리학계의 큰 쟁점이었던 콰크(Quark)와 참(Charm)이론연구로 명성을 높였고, 약작용과 전자기력을 통합하는 통일장이론(統一場理論)에도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입자물리학 분야에서 40여편의 논문을 남겼다.
1972년부터 3년 동안 재미한국과학기술자협회 부회장을 지냈고, 1974년 서울대학교에 대한 국제개발처(AID) 교육차관 타당성조사단의 일원으로 귀국하여 국내학계에도 큰 자극을 주었다. 살람(Salam, A.)·이원용(李元鏞) 등과 함께 서울에서 입자물리학국제심포지엄을 조직하던 중 일리노이주 남부에서 자동차사고로 죽었고, 이 모임은 이듬해 그의 추도심포지엄으로 열렸다.



이원철(李源喆)

1896∼1963. 천문학자. 호는 우남(羽南).
연희전문학교가 설립되던 해인 1915년 수물학과에 입학하여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면서, 당시 이 학교에서 현대천문학을 강의한 바 있는 루퍼스(Rufus, W. C.)로부터 천문학을 배웠다.
1919년에 졸업한 뒤 모교에서 수학을 강의하다가 1922년 미국 미시간주에 있는 엘비언대학에 유학하여 1학기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미시간대학 대학원에서 루퍼스의 지도를 받아 〈독수리자리의 에타성(星)의 대기운동〉이라는 논문으로 1926년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해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서 수학·물리학·천문학을 강의하는 한편, 여러가지 직책도 맡으면서 교육에 헌신하였다.
연희전문학교에서의 교수생활은 일제의 탄압정책으로 투옥됨으로써 끝났으나, 광복과 더불어 설립된 중앙관상대의 초대대장으로 16년간 재임하였으며, 이 기간중 인하대학의 초대학장과 YMCA 서울지부 이사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중앙관상대 대장직을 퇴임한 뒤에는 학술원 종신회원으로 과학발전에 공헌하는 한편,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 등으로 학사행정에도 참여하였다. 〈羅逸星〉




손계술(孫癸述)
1903∼1966. 물리학자·교육자. 경상북도 경주시출생.
경북중학교를 거쳐 1929년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이과(理科)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43년까지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물리학을 가르쳤다.
민족주의 정신이 투철한 교육자로서, 일제하 일어사용을 강요할 때도 그는 우리말로 생활하고 교육하였기 때문에 불온사상가로 지목되어 마침내는 일본경찰에 붙잡혀 광복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광복과 함께 다시 교육계로 돌아와서 대구사범학교장을 거쳐 건국 후에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장과 이 대학 물리교육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는 교육자로서 강직한 성품을 지녔으며 학자로서의 정열과 탐구력도 겸비하고 있었다.
주로 원적외선(遠赤外線)과 극초단파(極超短波)의 동일성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권영대(權寧大)
1908∼1985. 물리학자. 본관은 안동. 호는 성봉(性峯). 태원(泰源)의 맏아들로 경기도 개풍에서 출생하였다. 부인 김세암(金世巖)과의 사이에 1남5녀를 두었다.
광복 이후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물리학계에 씨앗을 뿌려 오늘의 물리학계의 기반을 다져놓은 선구자적 학자이다.
1922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의 세이조고등학교(成城高等學校)시절에 물리학 이외에 철학 및 종교에 관한 많은 책을 탐독하여 뒷날 물리학자로서는 드물게 문필에 능하여 많은 수필을 남겼다.
그뒤 북해도제국대학에 입학하여 광학(光學)을 전공하고, 1934년에 귀국 하여 개성에 구원광학연구소(久遠光學硏究所)를 설립하여 광학연구를 계속하였다.
1938년에 송도중학교(松都中學校), 1939년에 개성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부교수로 부임하면서 후진양성과 연구생활을 본격화하였다. 서울대학교에서는 주로 광학강의와 광학연구에 진력하였다.
6·25사변으로 파괴된 연구실 재건에 힘써 국내에서는 최초로 우주선 측정장치를 조립하여 연구를 다시 시작하였다.
1957년 영국 브리스톨대학(Bristol 大學)에서 1년간 우주선 연구를 하고, 귀국 후 우주선을 쬔 핵건판(核乾板)에 대한 연구로 1961년 서울대학교에서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뒤 광학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레이저 분광학연구와 국내 최초로 건립된 입자가속기(사이클로트론)제작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74년 서울대학교에서 정년퇴임 후 한국에너지연구소 상임고문으로 활약하며 후학들의 연구에 자문하였다.
1952년 한국물리학회 창립발기인으로 큰 공헌을 하였고, 1960년 학회장으로 피선되어 10년간 학회발전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서울대학교에서는 1949년에 문리과대학 이학부장, 1954년에 대학원장서리, 1964년 문리과대학장을 지냈다.
물리학에 대한 기여로 1952년 학술원회원이 되었고, 1963년 태양활동극소기국제관측년(IQSY)한국위원회위원장, 1966년 한국과학기술총연합회부회장, 한국과학자협회장, 1967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한국위원회 과학부분위원장, 1969년 아이유지지(IUGG)한국위원회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주요연구논문은 〈간섭 필터의 비교 연구〉 외 수편의 광학분야 논문, 〈서울 및 제주지방에서의 지자기 및 우주선의 일변화〉 외 10여편의 우주선분야 논문, 기타 〈1MeV사이클로트론의 빔집중〉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자연과학―우주·물질·생명―》·《자연과학개론》·《광학》·《일반물리학》·《현대물리학》, 그리고 《과학하는 심상》 등 저·편저의 대학교재 수편과 수필집이 있다.
1963년 문화훈장, 1967년 과학기술상, 1973년 국민훈장모란장, 1982년 국민훈장무궁화장을 받았다. 〈權肅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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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벙이수령 12-09-24 13:11
   
이 휘소 교수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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