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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9-30 20:56
[기타] < 환단고기의 진실 >
 글쓴이 : 마고우르
조회 : 2,562  

< 환단고기의 진실 >
출처 : 2007.09.01 신동아 통권 576호(p628~658)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중국 동북공정, 일본 만선사관, 한국 강단사학에 던지는 도전장
● 환단고기에 실린 가림토 문자는 원시 한글?
● 환단고기가 위서(僞書)라면 천부경도 위서
● 중국 음양론과 확연히 다른, 3수론 담긴 천부경
● 단군교를 鬼道로 단정한 가지마 노보루
● 두 차례 월남하며 환단고기 가져온 이유립
● 현존 환단고기는 1949년 오형기가 필사한 것
● 1979년 환단고기 인쇄했다 파문당한 조병윤
● 고대 史書 수거령 내린 조선 정부
● 5공 실세와 군부, 그리고 이유립의 관계
● 일본 滿鮮사관, 중국 탐원·동북공정에 맞서는 환단고기
● 무속인 기도처가 된 강화도 단단학회
 ● 제1부 - 환단고기, 위서인가 진서인가
 ● 제2부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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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 환단고기, 위서인가 진서인가
 환단고기를 전한 이유립 선생.
  일본 요코하마 출생으로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한 일본인 변호사 가지마 노보루(鹿島昇·1925년생)씨가 번역한 것으로 돼 있는 양장본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국회도서관에서 접한 순간 기자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실크로드 흥망사’란 부제가 붙은 이 ‘환단고기’는 서기 1982년인 쇼와(昭和) 57년, ‘역사와 현대사(歷史と現代社)’를 발행인으로, ‘(주)신국민사(新國民社)’를 발매인으로 해서 도쿄에서 출간된 일본어 책이기 때문이었다.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
기자는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밝혀놓은 ‘환단고기’에 관심을 가져왔다. 위서(僞書) 시비에도 불구하고 ‘환단고기’가 우리 사회에 끼치는 지대한 영향 때문이다.
 
한글은 1443년 세종 때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문자는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에 의해 단기간에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 또한 정설이다.
 
한자(漢字)만 해도 갑골문에서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해왔고
알파벳도 북셈문자와 페니키아문자를 거쳐 발전해왔다.
 
일본의 가나(假名)는 한자 초서 등에서 유래했지만,
일본에는 가나 이전에 고대 문자가 있었고 그것이 가나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조선 세종대에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만들기 전, ‘원시 한글’이라 할
문자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원시 한글이 있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놀랍게도 환단고기는 그 해답을 제시한다.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라는 사람이 ‘삼성기’와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란 네 책을 한데 묶어
편찬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녹도문과 가림토 문자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편에는 환웅이 신지 혁덕이라는 사람에게 명하여
천부경을 ‘녹도문(鹿圖文)’으로 적게 했다는 내용이 있다. 환단고기를 연구해온 사람들은
“녹도문은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든 글자이고, 갑골문에 앞서 한자의 근원이 된 문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녹도문이 어떻게 생긴 문자인지는 밝히지 못했다.
 
녹도문은 표의(表意)문자일 가능성이 높고, 환단고기는 그 모양을 그려놓지 못했으므로
녹도문을 원시 한글로 추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환단고기 단군세기는 세 번째 단군인 가륵(嘉勒) 2년, 가륵 단군이 삼랑 을보륵이라는
사람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로 된 지금의 한글과 아주 비슷한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그 문자의 모양을 보여준다. 또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편은
단군세기를 인용해 삼랑 을보륵이 정음 38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가리켜 ‘가림다(加臨多) 문자’라고
한다며 앞의 가림토와 같은 모양의 문자를 보여준다.
 
  단군세기에는 ‘가림토’로, 태백일사에는 ‘가림다’로 한 글자가 다르게 표기돼 있지만,
환단고기는 원시 한글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세종 때의 집현전 학자들은 이 문자를 보고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이 아닐까.
  학자들은 다 알고 있지만 국민은 모르는 아주 이상한 사실 하나가 있다.
 
삼척동자를 붙잡고 “고구려를 세운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으면 열이면 열 “고주몽”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의 이름이 과연 고주몽일까?
 
  ‘고구려를 세운 인물은 고주몽이다’라고 밝혀놓은, 우리 민족이 펴낸 가장 오랜 사서는
‘삼국사기’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요,
 
이름은 주몽이다’라고 기록하고, 바로 다음에 ‘추모 또는 중해라고도 한다’라는 주를 달아놓았다.
 
주몽은 추모로도 불릴 수 있고 중해로도 불릴 수 있다고 삼국사기는 분명히 밝혀놓은 것이다
(원문 : 始祖東明聖王姓高氏諱朱蒙云鄒牟云衆解).
 
  고구려 시조는 주몽인가, 추모인가
‘주몽’과 ‘추모’와 ‘중해’는 발음이 비슷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말은 중국어와 다르다.
신라시대 우리말을 한자로 적기 위해 ‘이두’와 ‘향찰’를 썼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에서도 유사한 방법으로 고구려 말을 한자로 적었을 것인데,
어떤 이는 동명성왕을 주몽으로 적고, 어떤 이는 추모로, 또 어떤 이는 중해로 적었을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구려인들이 세 이름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했느냐는 점이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조 때인 서기 1145년 김부식이 편찬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것이
서기 668년이니,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패망한 때로부터 477년이 지나 만들어진 것이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또 하나를 살펴보자.
중국 길림성 집안에는 고구려 당대인 서기 414년,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태왕릉비가 우뚝 서 있는데,
이 비문은 ‘옛날 시조 추모왕은 북부여에서 나와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라고 되어 있다.
 
고구려 당대에 세워진, 삼국사기보다 731년 앞선 광개토태왕릉비에는
고구려 시조의 이름이 ‘추모’로 기록된 것이다.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의 이름을 ‘추모’로 밝히고 있는 광개토태왕릉비.
  지금 전해지는 삼국사기는 고려 때 김부식이 편찬한 바로 그 책이 아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삼국사기는 조선 태조 3년인 서기 1394년 김거두란 사람이
그때까지 전해진 삼국사기를 토대로 새로 목판을 만들어 찍어낸 것이다.
그러나 이 삼국사기는 빠진 글자가 있어 완독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조선 중종 때인 1512년 이계복이 김거두의 삼국사기를 개판(改版)해서
새로 찍어냈으며 이것이 오늘날 한글로 번역되고 있는 삼국사기다.
 
  1512년에 인쇄된 삼국사기가 고구려의 사실을 더 많이 담고 있을까,
고구려 당대에 세운 광개토태왕릉비가 사실에 가까운 진실을 더 많이 담고 있을까.
 
‘사실(史實)’은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조작될 수 있지만,
사람의 이름을 조작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더구나 광개토태왕릉비는 아들이 아버지를 자랑하기 위해 세운 것인 만큼
시조의 이름을 바꿀 이유가 전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 시조 이름을 ‘추모’로 부르는 것이 옳은데,
현대에 나온 모든 사서는 동명성왕을 주몽으로 부르고 있다.
TV 드라마까지 주몽으로 불러, ‘고구려 시조는 주몽’이란 인식이 고착화된 상태다.
 
  한글의 뿌리를 연구해야
추모 이야기를 거론한 것은 첫째, ‘고구려 시조 이름을 당대 이름에 가깝게 바로잡자’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고대 우리 민족이 쓰던 말을 한자로 옮기다 보면
다르게 적힐 수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삼국사기에 ‘북부여 속담은 활을 잘 쏘는 아이를 주몽이라고 하였다’는 대목이 있으므로
추모와 주몽은 활을 잘 쏘는 아이를 뜻하는 고구려 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고구려 말 발음을 한자로 옮길 때 추모로 적을 수 있고 주몽, 중해로도 적을 수도 있다.
추모와 주몽, 중해가 발음이 비슷하듯 원시 한글을 뜻하는 ‘가림토’와 ‘가림다’도 발음이 흡사하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는 고려 말의 이암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고려 말 우리 민족은
가림토와 발음이 비슷한 원시 한글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글자가 조선 세종조의 집현전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쳐 훈민정음이 탄생했을 수도 있다.
 
  위서 시비에도 불구하고 환단고기가 주목받는 것은 정확성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기록을 남기지 못한 옛날의 사실(史實)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추적해볼 수 있는데,
요즘 실시된 고고학적 발굴로 새로이 밝혀지는 사실 중에 환단고기의 내용과 일치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렇다면 가림토와 가림다 문자도 가벼이 넘길 수 없다.
 
집현전의 학자들이 아무리 위대해도 사람이 입과 목을 이용해 발음하는 것을 보고 수년 사이에
훈민정음을 만들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자는 쉽게 창안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위대한 학자들도 무엇인가로부터 힌트를 얻어야 역사적인 창조를 할 수 있다.
한글을 사랑하는 학자라면 한번쯤 환단고기의 진위부터 한글의 시원(始原)까지 모든 것을
연구해봐야 하지 않을까. 집현전 학자들이 환단고기에 제시된 가림토(가림다) 문자를 발굴해
그것을 토대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가정하고, 그 가정이 옳은지를 추적해보는 연구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치우 등장시킨 환단고기
사실 환단고기를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내용이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면서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 늘고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한국축구대표팀 응원단인 ‘붉은악마’는 치우천왕이 그려진 엠블럼을 들고 나왔다.
 
 언제부터 우리는 치우를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인물로 보게 됐는가.
치우를 단군보다 앞선 우리의 조상으로 인식하게 해준 것은 바로 환단고기다.
 물론 1911년에 편찬된 환단고기에 앞서 치우를 우리 선조로 규정한 책이 있었다.
1675년(조선 숙종 1년) ‘북애노인’이라는 호를 쓴 사람이 펴낸 ‘규원사화(揆園史話)’가 그것이다.
 
그런데 규원사화는 사서(史書)가 아닌 사화, 즉 ‘역사 이야기책’이란 이유로 역사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규원사화에 담긴 내용이 100% 허구일 가능성은 매우 작다.
 
일부는 분명 진실일 텐데 우리의 사학자들은 이를 위서로 단정짓고 아예 연구조차 하지 않았다.
  규원사화가 살려내지 못한 치우를 환단고기가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그것도 단군에 앞선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치우는 중국인의 조상?
그런데 치우가 우리 조상이 아니라 중국인의 선조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사실이 중국 학자들에 의해 밝혀진다면 치우를 앞세우며 좋아했던 한국인은 정말
우스운 존재가 된다.
 
문제는 치우를 중국의 선조로 만들려는 작업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인들은 황제, 염제와 더불어 치우를 중국인의 3대 시조로 꾸미고 있다.
 
  중국인을 가리켜 자칭, 타칭 ‘한족(漢族)’이라고 한다.
한족은 진시황에 이어 한(漢)고조 유방이 두 번째로 중원을 통일하고 난 다음에 생겨난 이름이다.
한나라가 등장하기 전 중국인을 가리키는 말은 ‘하화족(夏華族)’이었다.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나라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하화족은 중국을 이룬 전설상의 인물인 3황5제 가운데 5제의 첫 번째 인물인 황제를 시조로 여긴다.
한민족 하면 단군의 후예를 지칭하듯, 하화족은 황제의 후손을 의미한다.
하나라는 5제 중 한 명인 우(禹)가 세웠다고 한다.
 
  치우를 엠블럼으로 한 대형 깃발을 내세운 붉은악마 응원단.
  중국인은 황제가 이끄는 황제족과 경쟁을 하다 황제족과 하나가 된 종족을 3황 가운데
마지막인 염제(신농)가 이끈 염제족으로 보고 있다.
염제가 이끄는 염제족을 황제족이 제압함으로써 거대한 황제족이 만들어졌다는 것인데,
거대한 황제족을 중국인들은 ‘염황족’으로 부르거나 아니면 이들이 하나라를 세웠다고 하여
‘하화족’으로 부른다. 황제족과 염황족 하화족을 거론할 때 치우가 이끄는 치우족은 배제된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 사서는 황제(헌원)가 탁록이라는 지역에서 치우와 싸워 이김으로써
패권을 장악했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탁록 전투에서 치우가 이끄는 종족이 황제가 이끄는 종족을 이겼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승패의 결과가 다르긴 하지만 중국 사서와 환단고기 모두 황제족과 치우족이 싸운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로부터 수천년이 흐른 지금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는 중국인들은 치우가 황제, 염제와 더불어 그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995년, 중국인들은 치우와 황제가 역사적인 결전을 벌인 탁록에 ‘귀근원(歸根苑)’이란 이름의
사당을 만들고 그 안에 황제와 염제, 치우를 모신 ‘삼조당(三祖堂)’을 세웠다.
 
그리고 치우가 황제, 염제와 함께 중국 민족을 만들었다며 이들을
 ‘중화3조(中華三祖)’로 통칭하기 시작했다.
 
만일 치우가 중국인의 조상으로 자리매김한다면 우리는 중국인의 조상을 우리 조상이라고
주장한 ‘바보 같은’ 민족이 된다. 물론 환단고기도 쓰레기 같은 잡서로 굴러떨어질 것이다.
 
 환단고기가 위서(僞書)라면…
그러나 중국인들이 우리 민족을 일컫는 ‘동이족’의 선조가 치우라는 주장은 점점 힘을 받고 있다.
환단고기가 없었으면 우리는 짧은 시간 내에 치우를 우리 조상으로 내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환단고기와 관련해 또 하나 주목할 것이 환단고기가 등장한 후 초·중·고교 역사교과서에
단군이 실존인물, 단군조선이 실재한 나라로 적시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환단고기는 ‘환웅과 단군 시대에 관한 옛 기록’이라는 뜻인데, 이 책은 단군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대통령과 같은 ‘자리 이름’이라며 47대 단군 이름을 밝혔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단군조선을 적시한 우리 교과서도 위서 시비에 빠질 수 있다.
환단고기의 위력은 비단 역사와 문화현상에 한정되지 않는다. 종교계와 학계에 두루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가림다 문자가 나오는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는 ‘소도경전본훈’편이 있는데,
여기에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가 실려 있다.
 
  천부경은, 환단고기와 별도로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천부경의 등장으로 한국철학사와 한국종교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주장까지 일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철학은 중국에서 생겨난 유학을 다루는 경우가 많았고
삼국시대에 이 땅에 전래된 불교는 한국화한 종교로 여겨져왔다.
 
우리 민족이 외래 사상과 종교를 받아들여 ‘우리화’했다는 것이 한국철학과 한국 종교의 큰 줄기였는데,
 환단고기와 함께 천부경이 등장하자 천부경이야말로 외래 영향을 받지 않고 순수하게 우리 조상이 만든
철학이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음양오행론과 다른 천부경적 세계관
 
천부경과 삼일신고, 그리고 환단고기에 실린 또 하나의 경전인 참전계경은 유학이나 불교와 다른
우주관을 제시하고 있다.
 
유교적, 또는 중국적 세계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주 인용되는 것이 음양오행론이다.
음양오행론은 다르게 발전해온 ‘음양론’과 ‘오행론’이 중국 전국시대에 합쳐짐으로써 생겨났다.
 
  음양론은 전기의 플러스(+)와 같은 양(陽)과 마이너스(-)와 같은 음(陰)으로 만물의 변화 원리를 설명한다. 음양을 6개로 한정해 모아보면, 6개가 모두 양인 것에서부터 6개 모두가 음인 것까지 모두 64개가 만들어진다(2×2×2×2×2×2=64). 이러한 64괘 가운데 ‘반쪽짜리’ 4괘가 바로 태극기에 들어 있는 ‘건·곤·감·리’다.
 
  주(周)나라 시절 중국인들은 자연변화를 64괘로 압축했다.
그리고 미래를 살피는 점을 치면서 64괘 가운데 어느 하나를 뽑게 했는데,
이때 뽑아낸 괘를 보면서 거꾸로 미래 상황을 펼쳐 보였다.
세상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한자로는 ‘역(易)’으로 표현하니, 주나라 때 만들어진 이
인식체계는 ‘주역(周易)’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오행론은 우주를 구성하는 에너지 원소를 수·화·목·금·토 다섯 가지로 본다.
이 다섯 가지 기운 가운데 물(수)과 불(화)처럼 충돌하는 관계도 있지만,
물(수)이 나무(목)를 잘 자라게 하듯 도와주는 관계도 있다. 물은 불을 꺼버리므로 물은 불과 상극관계이고, 물이 있어야 나무가 잘 자라므로 물과 나무는 상생관계라고 본다.
 
  그러나 상극이라고 해서 무조건 최악은 아니다.
물과 불이 ‘솥’이라는 매체로 분리돼 있다고 가정해보자.
물은 솥에 담겨 있고 솥 밑에 이글거리는 불이 있다면,
불은 가진 능력을 다 발휘해 탈 수 있고, 물은 설설 끓어 음식을 익힐 수 있게 된다.
솥으로 분리된 물과 불은 자기 성질을 극대화함으로써 음식을 익히는 새로움을 창출하니
이때의 물·불은 상극관계가 아니다.
 
  천·지·인의 3수론
  환단고기의 단군세기 등에 실려 있는 가림토 문자. 원시 한글일 것으로 추정된다.
  오행론은 수화목금토 사이에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놓고, 어느 것과 어느 것이 어떤 조건으로
만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정리해놓은 것이다.
 
음양론과 오행론이 공자를 태두로 한 유교에 흡수됐고, 그러한 유학이 한반도로 유입됐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퇴계와 율곡에 이르러 성리학이 꽃을 피우는데, 퇴계의 성리학이 정유재란 때
일본에 잡혀간 강항(姜沆·1567~1618)에 의해 일본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1561~1619) 등에게
전파됐다. 그 영향으로 500여 년에 걸친 내전(전국시대)을 종식한 일본의 ‘도쿠가와(德川) 막부’는
퇴계의 성리학을 토대로 한 문(文)의 시대로 들어간다.
 
이러한 흐름이 있는 만큼 음양오행론은 한·중·일의 공통된 사유체계로 이해돼왔다.
이러한 사유체계를 거부하는 것이 천부경이다. 음양론이 음과 양 두 개의 수로 만물 변화를 설명한다면,
천부경적 사유체계는 천(天)·지(地)·인(人) 세 개의 수로 만물의 변화 원리를 설명한다.
음양론은 두 개로 설명을 하니 대립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천부경적 사고는 변증법의
 ‘정-반-합(正反合)’ 이론처럼, 제3의 방안을 제시해 대립을 해소하는 것이 특징이다.
 
  천부경의 우주관은 불교의 우주관과도 다르다. 주목할 것은 천부경이 환단고기에만 실려 있을 뿐
중국이나 인도에서 나온 서적에는 실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천부경적 사유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학자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천부경’을 입력하면 김백호, 최민자, 수월제, 이중철, 김현두, 김백룡, 최동환, 문재현, 유정수,
 권태훈, 조하선, 윤범하, 등 수많은 학자가 주해한 천부경 관련 서적이 뜬다.
 
  현재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삼고 있다.
대종교는 1909년 나철이 개창한 ‘단군교’에서 비롯됐다. 단군교는 1910년 대종교로 개칭했는데,
이때 나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단군교’라는 이름을 유지하며 떨어져 나갔다.
앞에서 밝혔듯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에 의해 처음 편찬됐으니 천부경은 그때 세상에 알려진 셈이다.
 
  그러나 당시의 대종교와 단군교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삼지 않았다.
대종교를 이끈 나철은 1916년 xx하고, 이듬해인 1917년 계연수는 대종교에서 떨어져 나간
단군교에 천부경을 전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1920년 일제가 단군교를 없앰으로써 단군을 모시는
종교는 대종교만 남게 됐다.
이때 단군교를 따르던 많은 신자가 대종교로 넘어왔지만 대종교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종교가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것은 55년이 흐른 1975년에 이르러서다.
가장 오래된 천부경은 환단고기의 천부경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민족종교인 대종교가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것은 예사로 볼 일이 아니다. 환단고기가 특정인이 지어낸 위서로 밝혀진다면
이 책에 실린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대종교는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천부경이 환단고기에만 실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편에 천부경을 찾아낸 최초의 인물이 신라의 최치원(857~?)이라고 기록돼 있는데, 최치원은 ‘문창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최치원의 후손인 최국술은 최치원 사후 1000년 이상이 지난 1925년, 집안에 전해오던 최치원의
글을 모아 ‘최문창후전집’을 펴냈다. 이 ‘최문창후전집’에도 천부경이 실려 있다고 한다.
천부경은 81개의 한자로 구성돼 있는데, 최문창후전집에 실린 천부경은 환단고기에 실린
천부경과 74자는 같고 7자가 다르다.
 
  그러나 7자는 의미가 달라질 정도로 다른 한자가 아니라 거의 유사하게 해석되는 한자다.
이 때문에 천부경이 환단고기 쪽으로 전해지는 과정과 최치원 집안에서 전해지는 과정에서
7자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조선 말의 기정진(奇正鎭·1798~1879)도 그때까지 구전되는 것을 전해 듣고 천부경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 천부경은 기정진 선생의 제자의 제자인 김형택씨가 ‘단군철학석의(1957)’란 책에 남겨놓았다.
 이 책에 실린 천부경은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1자가 다르나, 역시 해석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 세 가지 천부경 가운데 정본으로 여겨지는 것이 환단고기의 천부경이다. 대종교도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같은 글자의 천부경을 경전으로 인정한다.
 
  세 책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것이 환단고기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최문창후전집에 나오는
천부경과 단군철학석의에 나오는 천부경은 환단고기를 참고해 만들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천부경도 위서가 될 수 있다.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대종교와 천부경을 민족철학으로 여겨 해석한 학자들도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된다. 그런 상황인데도 한국 지식인들은 환단고기의 실체를 제대로 추적하지 않고 있다.
 
  안타깝게도 1911년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 4권의 책을 묶어 펴낸 환단고기는 지금 전하는 것이 없다.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편찬했다는 것은 간접적으로만 확인될 뿐이다.
1920년 중국 도교 전문가인 전병훈(全秉薰·1857~1927)은 ‘정신철학통편’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는 이 책 서문에 천부경 전문을 싣고 해석을 달아놓았다.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은 지금 전하고 있으므로 이 책은 천부경을 실은채 인쇄된 가장 오래된 책이다.
 계연수는 1911년 환단고기 필사본 30부를 만들었다고 하므로 전병훈은 이를 보고 출간을 앞둔
‘정신철학통편’에 실었을 가능성이 있다.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주장하는 세력 가운데 일부는 “환단고기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먼저 출판됐다”고 주장했다.
계연수가 만든 환단고기는 없고 그의 제자라는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출판사를 통해 인쇄해 내놓기 전에 일본에서 환단고기가 나왔다면 이유립은 거꾸로 일본판 환단고기를 베껴 한국에서 출판했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한국 출판사에서 출간된 환단고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985년 김은수씨의 ‘주해 환단고기’(가나출판사)와
임승국씨가 1986년 5월 정신세계사에서 내놓은 ‘겨레를 밝히는 책들-한단고기’이다.
임씨는 이유립씨와 함게 국사찾기 운동을 한 사람인데, 그는 ‘환단고기’가 아니라 ‘한단고기’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가 쓴 ‘실크로드 흥망사’라는 부제가 붙은 ‘환단고기’가 1982년 ‘역사와 현대사’에서 출간된 것으로 확인됐으니 기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수밖에….
 
  가지마 노보루가 출판한 환단고기가 일본인들이 창작한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환단고기를 ‘민족의 시원을 밝혀주는 역사서’
‘민족의 철학을 밝혀주는 지침서’로 흠모했다면 정말 어리석은 민족이 될 것이다.
다급해진 기자는 환단고기를 출간한 국내 출판사를 하나씩 접촉하며 어떤 경위로 이 책을 내게
 됐는지 알아봤다.
 
  환단고기는 참으로 많은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앞에서 언급한 임승국씨의 한단고기(정신세계사) 외에도,
1987년 고려가라는 출판사가 다섯 권으로 펴낸 ‘대배달민족사’ 제1권에 실린 환단고기,
1989년 김은수씨가 주해해서 기린원이 펴낸 환단고기,
1994년 민족문화사 편집부가 출간한 환단고기,
1996년 계연수를 편자로 해서 한뿌리출판사에서 내놓은 환단고기,
1998년 코리언북스출판사가 단학회연구부를 엮은이로 해서 출간한 환단고기,
2000년 바로보인출판사가 문재현씨의 풀이로 내놓은 환단고기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와 국내에서 출간된 환단고기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기자는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 원문(한자)과 국내에서 출간된 환단고기의 원문이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발견은 한편으로는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 해석을 한국어로 번역해 출판했다는
오해를 나을 수도 있으므로 기자의 마음은 다급해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위서 시비가 있는 책인데….
 
  조급함은 곧 불안감으로 증폭됐다.
놀랍게도 가지마는 환단고기를 일본 신도(神道)에 접목시켜놓았기 때문이었다.
가지마는 일본 신도의 원류를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 환단고기를 번역했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서기는 모략위서(謀略僞書)다’라는 제목을 단 머리글에서 위서 시비가 있는
일본서기의 일부 내용을 부인하며 환단고기 내용을 토대로 새로운 신도 이론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反유교 反조선 기치 내건 개화기 일본
가지마는 어떤 생각을 했기에 일본 신도의 정통성을 바로 세운다며 환단고기를 출간한 것일까.
그 답을 찾아준 이는 서울 청운동에 있는 ‘국학연구소’의 김동환 연구원이다.
일본 신도를 연구하는 김 연구원은 가지마를 ‘의식 있는 일본의 재야사학자’로 정의했다.
김 연구원으로부터 일본 신도의 역사와 가지마 노보루의 역할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불교의 절과 신도의 신사(神社)가 함께 있는 것을 숱하게 볼 수 있다.
일본의 근대화는 조선 퇴계에서 비롯된 성리학적 세계관과의 결별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도쿠가와 막부 시절의 일본이 친(親)유교(성리학), 친(親)조선이었다면,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의 일본은 반(反)유교 반(反)조선이라 할 수 있다.
근대화를 위해서는 봉건제에서 벗어나야 하므로 일본은 한반도로부터 문화가 들어왔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일본에도 고유한 문화가 있었음을 보여줘야 했고, 메이지(明治)시절 일본의
엘리트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 등 일본의 고유 자료를 강조했다.
이런 움직임은 성리학을 수용한 막부를 날려버리고 일본적인 것을 상징하는 천황 중심으로
뭉치자는 주장으로 이어져, 천황 숭배가 강화됐다.
일본 천황의 위패는 대개 신궁에 모시니 신도를 부흥시킬 필요가 있었다.
 
  일본은 불교가 들어온 7세기부터 신사와 절을 공존, 융합시키는 ‘신불습합(神佛習合)’의 전통을 이어왔다. 신사와 절이 함께 있고, 가정에는 신도의 제단인 ‘가미다나(神棚)’와 불교의 제단인 ‘불단(佛壇)’이 함께 놓인 것이 바로 신불습합의 전통이다.
 
  신도를 부흥하려 한 일본의 엘리트들은 불교도 봉건적이고 외래적인 것으로 보고 불상과 불경을 훼손하고 거부하는 ‘폐불훼석(廢佛毁釋)’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불교는 신도만큼 민중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라 척결할 수 없었다.
그러자 엘리트들은 불교 탄압을 중단하고 신불습합을 인정하며 신도 부흥에 매진했다.
 
  이 시기 일본은 총리대신 밑에 전국의 신궁과 신사를 관리하는 ‘신기국(神機局)’을 뒀다.
신기국은 일본서기와 고서기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조작하는 일을 진두지휘했다.
일본을 한국보다 오래된 전통문화를 가진 나라로 바꾼 것이다.
신기국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도 일본의 토속신을 모시는 신궁과 신사를 만들게 했다.
 
 
“신국민과 만선사관을 위해 번역”
가지마 노보루가 1982년 일본어로 번역 출판한 환단고기와 서문. 표지에는 ‘실크로드 흥망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러한 운동이 일기 전, 일본 신도를 부흥시킨 인물로 꼽히는 ‘고사기전(古事記傳)’의 저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1730~1801)가 일본 국학 부흥을 부르짖었는데,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국민(國民)’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국민은 국가가 결정한 것을 그대로 따르는 민중이다.
이 때문에 군국주의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자 했을 때 일본인들은 이를 비판 없이 수용했다.
가지마 노보루는 비판 없는 맹종이 일본인에게 패전과 피폭(被爆)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가져왔다고 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할 때까지 일본 헌법에는 신기국을 둔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을 패망시키고 군정을 실시한 미국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킨다’는 원칙에 따라
새로 만든 헌법(평화헌법)에는 신기국을 둔다는 조항을 넣지 않았다.
이로써 일본 신도는 메이지 시대 이전처럼 자력으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시절로 되돌아갔다.
 
  이때 ‘신도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한 일본인들은 ‘신도의 위기는 비판 없는 일본인의 근성에서
비롯됐다’고 보았다. 이들은 ‘국민’이란 단어에는 ‘무비판’과 ‘무조건 수용’의 뉘앙스가 담겨 있으니
이제 일본인은 국민이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국가의 인민임은 부정할 수 없어 ‘신국민’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일본의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이 가지마 노보루다.
 
  다음은 이유립에게 환단고기를 배운 창해출판사 전형배 사장의 의견이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일본은 동북아를 무대로 한 역사 주체 가운데 방계에 해당한다.
일본은 동북아 역사 무대의 중심이 아니었지만 지금부터는 중심이 되자는 것이 신국민이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다.
 
  이는 미국과 영국의 관계와 비슷하다.
미국은 영국에서 갈려나온 방계이지만 지금은 영국을 제치고 세계의 중심이 됐다.
그와 마찬가지로 일본인도 동북아의 주무대에서 갈려 나온 방계이지만 지금부터는
동북아의 중심이 돼야 한다며 그 일을 할 주체세력으로 신국민을 설정했다.
 
한반도와 만주에 살던 형님이 못한 일을 섬에 살던 일본인이 대신해서 하자며,
신국민을 그 일의 중추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의지는 중국에 문화적으로 편입돼 있는 조선은 물론이고 아예 중국의 영토가 된
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내 일본과 같은 역사를 만들어온 공간으로 삼자는 ‘만선(滿鮮)사관’과 궤를 같이한다.
 
만주와 조선에 있는 형님이 잃어버린 정신을 일본에 살던 동생이 대신 세우겠다는 것이
만선사관과 신국민에 담긴 의지다. 가지마는 그들의 뿌리를 찾기 위해 환단고기를 번역한 측면이 있다.”
 
  “미국이 영국 대신하듯 일본이 한국을 대신한다”
  이유립 선생이 타계한 후인 1987년에 출간된‘대배달민족사’(전5권).
  신국민은 비판능력이 있어 나라가 결정한 것을 무조건 따르지 않는다. 신국민은 메이지 시절의 엘리트가 조작한 일본 고대사를 객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 바로 가지마 노보루의 책을 출간한 ‘신국민사’다.
 
  신국민사는 신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일본 재야 사학자와 재야 국학자들의 모임이 됐다. 가지마는 이 모임의 핵심이기에 ‘환단고기’ 서문에 ‘일본서기와 고서기는 모략위서다’라는 제목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가지마 노보루는 불교와 유교가 들어오기 전 한반도와 일본에는 고유한 종교가 있다고 봤다. 일본에서는 이를 신도라 하고 한국에서는 선도(仙道)라 하는데, 가지마는 일본의 신도와 한국의 선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으로 여겼다. 중국에서는 유교 외에 신도나 선도와 비슷한 도교(道敎)가 생겼는데, 이 셋이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게 가지마의 생각이다.
 
  ‘鬼道 檀君敎’
가지마는 한·중·일 3국의 토속 종교 간의 영향을 분석하는 것이 일본 신도의 이론을 세우고 발전시키는 초석이라고 여겨 한국인보다 먼저 환단고기를 번역 출판한 것이다.
 
그 후 가지마는 역시 신국민사를 통해 ‘신도이론대계(神道理論大系)’라는 신도 교과서를 펴냈는데, 여기에서 그는 한국의 선도를 연구한 속셈을 분명히 밝혔다.
 
  ‘신도이론대계’의 제5장은 ‘신교오천년사(神敎五千年史)’란 제목인데 여기에 ‘귀도 단군교(鬼道 檀君敎)’란 문구가 있다. 가지마는 홍암 나철이 만든 민족종교인 단군교를 귀신 숭배하는 종교로 정의한 것이다. 그리고 단군교는 일본 신도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고도 규정했다.
 
  고대에는 일본의 신도가 한반도의 선도나 중국의 도교로부터 영향을 받았겠지만 근대에는 거꾸로 일본의 신도가 한국과 중국에 영향을 줬다는 것이 가지마 노보루의 주장이다. 만주와 조선은 일본인의 역사공간이라는 만선사관으로 무장한 일본의 우익을 우리는 어떤 논리로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은 또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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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 
 
  김동환 연구원에게서 가지마 노보루 이야기를 들은 기자는 취재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환단고기의 위서(僞書) 여부를 밝혀보려던 목적은 잠시 접고, 가지마가 환단고기를 먼저 번역 출간한 이유부터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국내에서 나온 대부분의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란 인물이 환단고기를 편찬했고 이유립이 이를 세상에 전달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도 계연수와 이유립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두 사람의 실체부터 추적해보기로 한 것이다.
 
  환단고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계연수는 실존인물이 아니거나 가명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또 다른 일부는 “이유립이 우회적으로 한국 사회를 자극할 요량으로 가지마에게 먼저 환단고기를 건네줬다”고도 주장한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이유립도 실존인물이 아니다. 가지마가 환단고기를 한국에서 가져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허위로 이유립이라는 인물을 내세웠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두 사람을 추적하는 일이 시급했다.
 
  계연수는 실존인물이라 하더라도 1911년대의 사람으로 이미 고인이 됐을 것이니 이유립의 실체부터 추적해보기로 했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전했다는 이유립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 기자는 환단고기를 펴낸 출판사를 상대로 이 질문을 던졌는데, 1996년 환단고기를 출간한 바 있는 한뿌리출판사의 권태흥 대표가 “이유립을 알고 싶으면창해출판사의 전형배 사장을 만나라”는 결정적인 힌트를 주었다.
 
  전형배 사장을 만나면서 이유립에 대한 의문은 눈 녹듯이 풀리게 되었다.
전형배(全炯培·48) 사장은 보성고, 고려대 정외과 79학번 출신의 출판인이다. 전 사장은 1998년 창해출판사의 자회사로 ‘코리언북스’를 만들어 단학회연구부를 엮은이로 한 ‘역주본(譯注本)·장구본(章句本)’이라는 부제를 단 세 권짜리 ‘환단고기’를 내놓은 바 있다(장구본은 환단고기를 장과 구로 나눠 정리했다는 뜻).
 
 
  5·16 반혁명 사건 연루자 박창암
  월간 ‘자유’를 창간해 국사 찾기 운동을 벌인 고(故) 박창암 장군.
  그는 “환단고기와 이유립에 대해 알고 싶다”는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고교 시절 그는 역사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동북공정 문제가 불거진 지금은 간도가 어디인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엔 간도가 어디에 있는 땅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국사시간에 그는 선생님에게 “간도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가 “시험을 앞둔 놈이 엉뚱한 질문을 한다”고 쥐어박혔다고 한다. 국사 선생도 간도의 위치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는 국사 찾기운동을 펼치는 박창암(朴蒼巖·1921~2003, 육군 준장으로 예편)씨가 펴내는 월간지 ‘자유’를 접하게 됐다.
박씨는 아호를 ‘만주’라고 정할 만큼 간도를 비롯한 고구려와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함남 북청 태생으로 만주국립연길(간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간도의 조양천(朝陽川)초등학교에서 교사를 하다 1943년 만주국 군대인 간도특설대에 입대했다.
 
  간도특설대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공산게릴라를 추적하기 위해 만주국이 조선인을 뽑아 만든 대(對)게릴라전 부대였다.
 
지금은 간도특설대가 공산게릴라뿐 아니라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독립군까지 탄압했다고 해서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아무튼 간도특설대 출신의 박창암씨는 이후 흔들리지 않고 강력한 반공(反共) 외길을 걸었다.
 
  광복 후 그는 평양에서 협신(協新)공업학교 교사를 하다 서울로 옮겨 1949년 육군 중위로
임관해 6·25전쟁을 치르게 됐다. 전쟁 중 그는 빨치산을 토벌하는 작전과 대북 심리전 분야에
주로 참여했다.
 
 이러한 그가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군사정변에 참여하면서다.
그는 5·16에 주체세력으로 참여해 구정권의 부패를 날리는 서슬 시퍼런 ‘혁명검찰부’의 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2년 후인 1963년 3월11일 김재춘씨가 이끄는 중앙정보부는 그가 반혁명사건에 연루된
인물이라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5·16 당일 박정희 소장과 함께 해병대를 이끌고 한강 인도교를 건너
 쿠데타를 성공시킨 김동하 예비역 해병대 중장과 박임항 예비역 육군 중장,
 이규광 예비역 육군 준장(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인 이순자 여사의 삼촌) 등 5·16 핵심 멤버가 그와 함께
 5·16을 뒤집는 반혁명을 모의했다고 발표했다.
 
이유립과 박창암의 만남
박정희 세력이 아직 민정(民政)으로 이양하지 않은 시점에서 터져 나온 이 반혁명사건은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이 사건은 ‘군사혁명을 통해 목적한 바를 성공시켰으니 이제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자’는 세력과, ‘군사혁명을 성공시켰으니 차제에 군복을 벗고 정부를 이끌어 군사혁명의
취지를 강화하겠다’는 박정희 세력 사이의 갈등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법정에 선 박창암씨는 “혁명의 목적은 달성됐으므로 군은 당초의 약속대로 참신한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맹비난했다.
 
  재판부는 박씨에게 징역 13년을 선고했으나 1년 후 그는 형 면제처분으로 석방됐다.
그가 교도소에 있는 사이에 박정희는 대장으로 전역하고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박씨 등에게 형 면제처분과 함께 복권 조치를 취했다.
 
교도소에서 나온 박씨는 박정희 정부와는 거리를 두고 그가 생각해온 철학을 관철하기
 
위해 1968년 사재를 털어 월간  ‘자유지’를 창간했다.
 
  반혁명사건으로 투옥되기 전까지 박창암씨의 키워드가 반공이었다면 자유지 창간 이후
그의 주제어는 ‘국사(國史)’로 바뀌었다.
 
1차적인 계기는 그가 간도에서 자랐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고,
2차적 계기는 당시 대전 지역에서 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하던
이유립씨와의 만남을 꼽아야 할 것 같다.
박씨와 의기가 상통한 이유립씨는 1970년대 중반부터 ‘자유’지에 글을 싣기 시작했다.
이유립씨는 ‘자유’지 전체 지면의 절반 정도를 자신의 글로 ‘도배’하며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같은
주장을 내놓았다
 
  박창암씨 소개로 이유립씨 제자가 된 전형배
이를 계기로 이유립씨는 주요 언론인과도 교류하기 시작해
1978년 10월22일자 조선일보에는 ‘잘못된 국사 원상대로 찾아야 한다’는 제목으로
조선일보 주필인 선우휘씨와 이유립씨가 대담하는 기사가 실렸다.
 
1979년 고려대에 입학한 전형배 창해출판사 사장은 ‘자유’지를 통해 막 지식인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유립을 접하게 된 것이다.
 
  반혁명사건으로 법정에 선 박창암씨와 반혁명사건을 보도한 한국일보 호외.
  만주 지역 역사와 고토(故土) 회복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전형배씨는 1979년
여름 어느날 박창암씨를 찾아갔고 그의 소개로 의정부에서도 가장 변두리인 자일동에 있는
이유립씨 집을 방문하게 됐다. 그때 전씨는 경주법주를 사들고 갔는데, 그를 맞은 이유립씨는
대뜸 “술 사올 돈 있으면 책을 사보거나 책을 사오라”고 면박을 줬다고 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전씨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이유립씨로부터 역사와 한문을 배우게 됐다.
한문으로 된 환단고기를 읽고 그 뜻을 푸는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겸손의 표현인지 몰라도 전씨는
“그때 나는 공부보다는 선생님을 모시는 시봉 노릇에 더 열심이었다”고 했다.
사실 그는 이유립씨를 지원하는 일을 많이 했다.
 
  전형배 사장과의 만남을 통해 이유립이 실존인물임을 확인한 기자는 취재 폭을 확대하면서 더욱 흥미로운 사실을 찾아냈다. 먼저 취재에서 확인된 이유립이란 사람부터 정리해보기로 하자.
 
이유립 집안은 환단고기와 깊이 엮여 있었으므로 그의 집안 내력을 살펴보고 그와 환단고기,
그리고 계연수, 가지마 노보루와의 관계를 추적해보자.
 
  이유립(李裕岦1907~1986)은 평북 삭주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삭주라는 지방이다.
삭주는 중국과의 국경선인 압록강변에 있는데, 이곳에서 5km쯤 떨어진 곳에 수풍댐이 있다.
그의 부친인 이관즙(李觀楫)은 5남3녀를 뒀는데 이유립은 이 중 다섯째, 아들로는 4남으로 태어났다.
이유립의 재능이 출중했기 때문인지 부친은 다른 아들들은 농사를 짓게 했으나 그에게만은 한학을 공부시켰다고 한다.
 
  이유립은 여섯 살 때 ‘동몽선습’을 공부했는데 동몽선습에는 ‘한나라의 무제께옵서 이를(위만조선을) 토멸하시고’라는 ‘한무제 토멸지(漢武帝 討滅之)’라는 문구가 있다. 이유립은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를 멸망시킨 자를 중심으로 한 글을 읽기 싫다”며 동몽선습 공부를 중단했다고 한다.
여섯 살짜리 꼬맹이가 이러한 역사의식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집안 내력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유립의 본관은 경남 고성(固城)인데, 그가 경남 고성이 아닌 평북 삭주에서 태어난 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가 환단고기를 전하게 된 것도 삭주에서 태어난 고성 이씨라는 사실이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고성 이씨 가계도를 살펴보기로 한다.
 
 
  유·불·선에 능통했던 이암
고성 이씨는 고려 덕종 때의 인물인 이황(李璜)을 시조로 한다. 이황의 후손은 대대로 큰 벼슬을 했는데, 이황의 9세손이 고려 말의 이암(李 嵒;·1297~1364)이다. 이암은 초등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조맹부체 글씨를 잘 쓴 명필로, 중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원나라에서 농업 전문서적인 ‘농상집요(農桑輯要)’를 가져와 고려에 전파한 인물로 나온다.
 
  이암은 유학을 공부한 문관이지만 무관 임무도 수행했다. 공민왕 8년(1359)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이를 막게 됐으나 방어에 실패했다. 이암은 작은아버지가 큰스님이어서 불교 공부도 많이 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작은아버지는 승보사찰인 전남 송광사에 모셔진 고려 16국사 가운데 13번째인 각진(覺眞) 국사다.
 
  이유립씨가 쓴 고대사에 대한 기사가 많이 실려 있는 1970년대의 월간 ‘자유’지.
  이암은 고래부터 전해오는 우리의 선도(仙道)사상에도 상당히 정통해,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첫 번째 책인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썼다. 단군세기는 단군이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왕’이나 ‘대통령’처럼 무려 47대를 내려간 직책 이름이라며 47대 단군 이름을 낱낱이 밝혀놓은 것이 특징인데, 셋째 단군인 가륵 시절 한글과 모양이 아주 흡사한 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단군세기에 들어 있다.
 
  한마디로 이암은 유·불·선(儒佛仙) 3교를 두루 섭렵한 인물인데 그는 유학을 근간으로 한 조선의 학맥에서는 배제되었다. 이에 대해 고성 이씨 용헌공파 종중 사무실에 근무하는 이영규씨는 이런 설명을 했다.
  “이암은 일찍이 성리학을 받아들인 학자다. 그의 제자가 고려 말 삼은(三隱) 가운데 한 명인 목은 이색인데, 이색은 고려 성균관의 대사성을 지내며 훗날 조선의 이념을 세우게 되는 많은 유학자를 길러냈다. 따라서 조선의 성리학은 이암-이색의 학맥을 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암과 이색을 조선 성리학 계보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조선 유학을 이어준 인물로 선정했다.
 
  사림파는 명분에 집착하는 정도가 강했으므로 지조를 지키기 위해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그들의 스승으로 삼은 것이다. 조선의 사림파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데는 이암과 이색이 유학만을 하지 않은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된 것 같다. 작은아버지가 스님이었던 이암과 그의 제자인 이색은 불가(佛家)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남겼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은 성리학 일색으로 점철된 사회였지만, 고려 말은 사상적으로 아주 분방한 사회였다. 이 때문에 이암은 전통적인 사서와 사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란 이후의 조선 유학자들은 성리학 일색으로 가면서 우리의 고유 사상과 역사를 배척했다. 이암이 조선 유학의 맥에서 배제된 것과 그가 쓴 단군세기가 주목받지 못한 것은 조선 유학자들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학을 공부했지만 조선을 이끈 정통 유학자 계보에서는 제외된 이암. 이것이 집안의 운명이 되면서 고성이씨 집안은 비(非)유교적인, 다시 말하면 우리 고유의 선도적인 것을 이어 나가는 계기를 잡은 것 같다. 이러한 추정은 이암의 현손(玄孫)으로 조선 연산군과 중종 때 활약한 학자인 이맥(李陌·1455~1528)의 등장으로 확인되는데, 이맥은 환단고기를 이루는 또 하나의 책인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저자다.
 
  북방사 위주로 정리한 이맥의 태백일사
태백일사는 삼신오제본기-환국본기-신시본기-삼한관경본기-소도경전본훈-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로 구성돼 있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는 우리 민족 중심의 천지창조를, 환국본기(桓國本紀)는 7대에 걸친 환인이 이끈 환국(하늘나라) 이야기를, 신시본기(神市本紀)는 환웅이 세운 배달나라 신시 역사를,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는 단군조선과 함께 3조선을 이룬 막조선과 번조선 역사를,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담고 있고, 고구려국본기는 고구려 역사를, 대진국본기는 발해 역사를 담고 있으니, 태백일사는 환단고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환웅이 이끈 신시 시대에서 고구려 사이에는 단군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이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은 빠져 있다. 왜 이맥은 고조선사를 빼놓은 채 태백일사를 쓴 것일까.
이유는 고조부인 이암이 ‘단군세기’란 이름으로 단군조선의 역사를 정리해놓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맥은 태백일사를 통해 고조부가 정리하지 못한 단군조선 이전 역사와 단군조선 이후의 북방사를 정리했다. 이와 관련, 이유립으로부터 환단고기를 받은 전형배 사장은 약간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과 삼한은 3개 국가 체제를 이루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 태백일사다. 세 조선 가운데 가장 중심인 조선이 단군이 이끈 ‘신조선’(만주에 위치)인데, 신조선에 대해서는 고려 말 이암이 단군세기로 정리한 바 있다. 이암은 나머지 두 개 조선인 ‘말한조선’(한반도에 위치)과 ‘번한조선’(중국 요서지역에 위치)에 대해서는 정리하지 못했다.
 
이맥은 고조부인 이암이 정리하지 못한 나머지 두 조선의 역사를 삼한관경본기에 정리함으로써,
세 개 조선으로 구성된 고조선사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맥은 고구려와 함께 존재한 신라와 백제의 역사는 물론이고 발해와 동시대를 이룬 통일신라사를 태백일사에서 빠뜨렸다. 이맥은 조선이 고구려와 발해사에 주목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의도적으로 누락된 역사인 북방사 위주로 역사를 밝혀놓았을 수 있다. 이맥이 이러한 선택을 한 데는 그의 집안 내력과 그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 상황이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이암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고려는 아직 성리학이 뿌리내리기 전의 나라인지라 우리 고유의 사상을 공부해도 무방한 분위기였다. 이러한 토대가 있었기에 불교식 역사서인 삼국유사를 쓴 일연과 서경(평양) 천도와 북벌을 주장한 묘청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었다. 이암은 요즘으로 말하면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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