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여러 번 강조했는데도 아무도 만계와 일계를 조사하지 않았군요.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고 피로 쓴 반지(半紙)가 봉입(封入)된 등기로 송부되어 관계자(係員)를 깊이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쪼록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만주신문> 1939.3.31. 7면)
이게 만주신문이 실은 혈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입니다. 그러면 만주군관학교에서 만계(蠻系)와 일계(日系)는 무엇이고 언제부터 뽑았을까?
1937년 중일전쟁으로 대륙침략을 본격 개시한 일본 육군은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장교 양성을 위해 1939년 만주국에 4년제 정식 사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정식명칭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로 흔히 신경군관학교라고도 불립니다. (신경 교외 라라툰(拉拉屯) 지역에 위치한 옛 신경군관학교 시설은 현재 중국인민해방군 장갑병기술학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939년 4월 만계(滿系) 1기생 90명이 입교하였고 이듬해 일계(日系) 학생 172명이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개교식은 일계 2기생이 입교한 1941년 6월 20일 거행됐습니다.
최초의 일계 군관모집요강은 무려 9개월 뒤인 1939년 11월 말에나 나왔습니다.
만주 신경군관학교의 일계(日系) 지원자 모집공고는 陸滿秘 공문 제1019호 (昭和 14年 11월 28일자)에 최초로 기안된 사실이 있습니다. 昭和
14年이면 1939년 11월 28일자입니다.
이 문서를 읽어보면, 일계(日系) 만주국군군관예과생도 지원자들은 어떤 자들이 지원할 수 있었고, 어떤 과정을 통해 선발되었는지 확인이 가능한데,
정규 일본육군사관학교 채용고시에서 탈락한 자들 중 비교적 우수한 자들을 만주국 치안부와 일본 육군성 교육총감부의 협의하에 지원이 가능하도록
모집요강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만계(滿系)의 경우 지원자가 거의 1만 명에 육박한 까닭에 치열한 공개선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으나, 일계(日系)는 일본육군사관 정규채용 선발에서
탈락한 자 중 육군성의 추천을 받은 자만 입학이 허용되었습니다.
9개월 후에 최초로 배포될 일계 모집요강을 어떻게 9개월 전에 알고 편지를 썼을지 의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