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가 증거로 제시한 만주신문 기사 사본 / 이 신문은 박정희가 1939년 3월 29일에 혈서를 썼다고 주장>
그러나 결정적으로 날짜가 맞지 않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 대통령이 1939년 3월 29일에 만주군관학교 입교를 위해 혈서를 썼다고 주장하였으나 만주군관학교는 1939년 2월 24일에 이미 합격자를 발표한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이미 합격자를 발표했는데 합격시켜 달라고 혈서를 썼다? 거대한 거짓말의 단초가 드러납니다. 더군다나 박정희 대통령이 간도조선인특설부대원으로 조선인들을 학살했다던 1939년 대사하 전투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은 조선의 문경소학교에서 교사로 재직중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문경소학교 가을 운동회에 참석했다는 내용이 실린 동창회지와 1940년에야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당시 교육당국의 서류가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반론>
일단 글쓴 사람 주장은 이미 합격자발표가 난 이후에 합격시켜달라고 혈서를 썼으니 거짓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을거야 합격자 발표가 났으면 과연 혈서를 쓰지 못할까?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고 피로 쓴 반지(半紙)가 봉입(封入)된 등기로 송부되어 관계자(係員)를 깊이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쪼록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만주신문> 1939.3.31. 7면)
이상이 만주일보에 실린 혈서내용 전문
먼저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
즉 박정희는 이번에 편지를 쓴게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즉 박정희는 이미 조건에 부적합했다 즉 탈락이었단 말이지
탈락이라서 편지를 보낼 필요가 없었다(합격자발표가 났기 때문에 보낼필요가 없었다)가 아니라 탈락했기 때문에 보낸거임
설마 합격자명단에 박정희란 이름이 보이기라도 하는거임?
박정희가 편지를 보낼 필요가 없는 경우는 박정희가 이미 합격했을 경우뿐이 없을텐데?
만약 그렇게 생각했다면 지만원한테 낚인거임
'합격자 발표가 났다'일 뿐이지 '박정희가 합격했다'는 아니거든
박정희의 합격및 입학은 1940년이거든 즉 1939년의 합격자발표는
박정희가 편지를 쓰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는 헛근거임
즉 위에 글을 보더라도 박정희가 원래 원한건 군관학교가 아니라 군관지원이었음
군관지원 합격 요건이 충족하지 못한거임
그러니 어쩔수 없이 나중에 군관학교에 들어간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