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articleid=20101201171908875h4&linkid=4&newssetid=1352
上略
실제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 6월15일 제1차 연평해전에서는 북측의 북방한계선(NLL) 침범으로 교전이 발생, 북측 함정 4∼5척이 침몰하고 북한 병사 30여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승전을 이끈 우리 해군 2함대 사령관은 교전 5개월 뒤 대기발령이 났고, 결국 진급도 못한 채 전역했다. 당시 북측이 우리군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고, 우리 정부는 이를 받아 들였다.
이 같은 본말전도는 3년 뒤 제2차 연평해전을 불렀다. 한일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던 2002년 6월 29일 북한은 제1연평해전의 패배의 보복차원에서 서해 NLL을 침범해 우리군과 교전을 벌였다.
당시 북한 해군 645호가 쏜 로켓포에 우리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 함장 윤영하 소령 등 6명이 사망하고, 18명의 대원이 부상했다.
햇볕정책을 폈던 김대중 정부는 우리군의 선제공격을 자제하는 교전수칙을 제정, 해군 장병들의 손발을 묶어 놓았다. 당시 선제타격을 하지 못한 우리 군의 피해가 커졌다는 여론의 따가운 지적을 받았다.
정권을 넘겨받은 노무현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는 정부에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백지화됐다. 2006년 7월엔 북한의 대포동2호 미사일, 2006년 10월에 북한 최초의 핵 실험이 강행됐다.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우리정부의 실질적인 조치는 전무했다.
下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