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프랑스는 나치청산의 전범(典範)국가로 불린다. 북구 노르웨이, 핀란드 등에 비해 강도는 낮았다는 지적도 없지는 않지만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나치청산 작업을 펼쳤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사례로 기록할 만 하다. 참고로 프랑스는 1940년 6월 26일 나치에 점령된 이후 4년 2개월 뒤인 1944년 8월 25일 파리를 해방시켰는데, 나치협력자란 이 기간에 나치 정권에 협력한 자를 말한다.
프랑스의 나치협력자(대독협력자) 청산은 1944년 6월 26일 드골이 전국에 ‘협력자재판소’를 설치하고, 이어 8월 28일 국치죄(國恥罪)를 저지른 자들의 사회활동을 금지할 목적으로 ‘시민재판부’를 설치하면서 본격 시작됐다. 앞서 대독 항쟁기간 중이나 해방 과정에서도 약식처형 형태의 협력자 처단은 더러 있었다. 이는 주로 레지스탕스 조직이 즉석에서 조직한 비상군법회의 형식의 재판인데 ‘거리의 정의’로 불린 이 재판에서 8,000~10,000명이 처형되었다.
나치협력자 재판은 협력자재판소, ‘비국민 판정’을 담당한 시민재판부, 그리고 비시정부의 고위책임자 처벌을 목적으로 설치된 고등협력자재판소 등 세 군데서 진행됐다. 1944년 하반기부터 1948년 12월 31일까지 협력자재판소에서 취급한 재판 건수는 총 55,331건에 달했다. 이들 가운데 6,763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그 가운데 767명은 처형되었다. 또 무기징역 2,702명, 유기징역 19,637명, 금고 24,927명 등 4만 명 가까이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3,578명이 공민권박탈을 당했다.
나치 점령 시절 독일군과 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파리 해방' 후 시민들에게 머리를 깎이고 있는 프랑스 여성
이와 별도로 시민재판부에서는 총 69,282건을 취급하였는데 이 가운데 46,645명이 공민권박탈을 당했다. 또 고등협력자재판소에서는 페탱 원수와 라발 총리 등 비시정부의 최고위층 인사 108명에 대한 재판을 벌여 사형 18명, 징역 및 금고형 22명, 시민권박탈 15명 등의 판결을 내렸다. 사형선고를 받은 페탱은 종신형으로 감형되었으며, 라발과 민병대장 출신의 다르낭 등은 처형되었다.
한편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숙청은 형사처벌 이외에 별도로 사회활동을 제한하거나 징계를 가하기도 했다. 우선 친독협력 문인들에게는 작품발표 금지령을 내렸으며, 나치에 협력한 공무원들에게는 징계를, 또 친(親)비시 노조 지도자들은 노조에서 쫓겨났다.
또 독일군 점령지역에서 15일 이상 발행된 신문사는 모두 ‘유죄’로 규정해 폐간시켰으며, 나치협력 언론사의 경영자를 처단하고 그 재산은 몰수하여 국유화시켰다. 또 비시정부에 복무했던 공무원 150만 명 가운데 22,000~28,000명이 행정숙청의 대상이 돼 해임이나 파면 등 각종 징계를 받았다. 이밖에도 부당이득몰수위원회와 업종간연합숙청위원회가 부문별로 구성돼 친독 기업주들과 기업체 간부들을 상대로 경제적 숙청을 단행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숙청은 전반적으로 문인과 언론인 등 지식인에 대해서는 사형·무기징역 등 중벌로 다스렸으나 공직사회나 기업인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처벌이 미약해 형평성 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처벌 규모는 엄청났다. 전국적으로 32만 명 이상이 협력자 혐의를 받았고, 실제 12만 5,000명은 재판을 받았으며, 그 중 9만5,000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나치협력자 숙청은 1950~1951년 시민재판부 및 협력자재판소 해체와 1951년, 1953년 두 차례의 대사면으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프랑스는 1980~1990년대에 진행된 ‘반인도죄’ 재판에서 친나치 의용대의 정보총책 폴 투비에에 대해 종신형을 선고하는 등 나치청산 작업을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참고로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처벌 근거 법령을 간단히 살펴보면, 가장 기본적인 법적 근거가 된 것은 형법이었다. 형법 제75조는 사형으로 다스릴 반역죄를 네 가지 범주로 규정하였는데, 1)프랑스에 대항하여 무기를 든 자, 2)적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등 적(敵)의 프랑스 침입을 도운 자, 3)프랑스 주권, 군대, 영토 시설을 넘긴 자, 4)프랑스에 적대하는 외국 군대에 복무한 자 등이다.
다음은 드골 임시정부에서 1944년 6월 26일 대독협력자에 대한 사법적 처벌을 목적으로 제정한 ‘협력행위 처벌에 관한 명령’인데 이는 협력자재판소 설치의 근거가 되었다. 이 명령 제정된 그 다음날 제정된 ‘프랑스 본토의 행정숙청에 관한 법령’은 비시정부 하에서 협력한 공무원에 대한 징계를 규정한 것으로, 공식자료에 따르면 모두 22,000~28,000명이 징계를 받았는데 그 가운데 절반가량이 면직 등의 중징계를 받았다.
한편 앞에서 언급한 두 ‘명령’은 법적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협력자를 대상으로 한 처벌규정이었다. 반면 이같은 처벌규정에는 미달하나 어떠한 형태로든 반민족행위를 저지른 프랑스인에게 응분의 정치적 권리, 즉 시민권을 박탈하는 조치가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도입된 것이 ‘국치죄(國恥罪)’였다.
구체적으로는 나치점령 시기에 중앙·지방정부에 참여하거나 각종 나치협력 단체에 참가한 행위, 적의 이념 유포나 이에 유리한 활동에 참가한 행위 등이 이에 속했다. 국치죄는 협력자재판소 내에 설치한 ‘특별재판부’가 재판을 담당하였으며, 선거권 박탈은 물론 공적 집단에서의 지위 해임 및 배제까지도 실행했다.
흔히 ‘비(非)국민판정’으로도 불리는 공민권 정지의 경우 선거권·피선거권 박탈, 공직 진출자격 박탈, 무기 소유·휴대 금지 등 사실상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한 준(準)사법적 조치로 이는 반역자들을 매장하고 프랑스 사회에서 그들의 재부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고안한 프랑스 특유의 ‘발명품’으로 불렸다.
끝으로 대독협력자에 대한 처벌과 숙청은 프랑스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문화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치협력 문화인 숙청을 목적으로 1945년 5월 30일 제정된 ‘문인·작가·작곡가·화가·조각가·판각사 숙청에 관한 명령’은 ‘전국 문인·작가·작곡가 숙청위원회’와 ‘전국 화가·조각가·판각사 숙청위원회’를 설치할 것과 이 두 위원회 주도로 이적행위를 했거나 레지스탕스운동을 방해한 작가 및 예술가들의 출판, 게재, 연주, 기고, 강연, 발표 등의 모든 공적 활동을 일시 금지시킬 것을 명시했다.
다만 처벌받은 자의 작품 중에서 학술적·역사적으로 공적 가치가 있는 작품은 예외로 했다. 프랑스가 나치 청산은 철저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드골이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PSㅡ 드골같은 사람이 진짜보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