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익의 독립운동 인사 학살사례
1924년 좌익의 임시정부 탈당
좌익세력이 임시정부를 탈출하여 창조파와 개조파로 갈라져서 임시정부를 없애야 한다면서 갈등을 하다가 먹혀들지 않자 자연스럽게 소멸되어 사라졌다. 개조파는 소련으로 창조파는 북중국 화북으로 각각 이동해갔다.
1928년 박용만 암살.
구미위원부와 임시정부로 보낼 자금을 모금하던 박용만이 거리에서 암살당했다. 이승만과 안창호의 동지이면서 라이벌 이었던 미국 한인회 지도자 박용만이 공산주의자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원이 저격한 것이다.
1926년 장군 김규식 암살.
만주 항일독립군벌의 지도자 중 한사람인 김규식을 중공계 공산당원이 암살했다.
1929년 자유시 참변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던 홍범도와 서일의 군정서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의 백러시아 자유시 지역으로 건너갔다. 몽고와 경계부에서 가까운 지점이다.
백러시아에서는 소련 공산당에 대항하는 백러시아 자유민주주의 운동가들이 있었다. 소련공산당에서는 한인 독립군에게 백러시아 군을 진압하는데 동참하면 활동을 지원하겠다고 했고, 한인 독립군은 그 약속을 믿고 백러시아 군과 교전했다.
그러나 약속과 달리 소련은 한인독립군에게 무장해제명령을 내렸다. 한인 독립군은 여기에 불응하였고, 소련은 소련공산당 소속 한국인 병사들을 보내 자유시에서 숙영하던 한국 독립군을 모두 살해하였다.
동포를 죽이면 안된다 하며 서일, 홍범도 등은 공격하지 말라고 했으나 공산주의자들은 한인독립군을 무차별 학살했다. 9백명이 현장에서 살해되고 8백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고 실종자도 2,3백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병력을 잃은 홍범도와 서일은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을 선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만주에 숨어있던 김좌진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반공인사가 됐다.
1931년 김좌진 암살.
반공이며 공산주의자들은 소련, 중국 공산당과 손잡은 매국노라 선언하고 토벌을 선언했다. 1931년 고려공산당원 박성실과 박상실 등이 북로군정서 숙소에 난입하여 김좌진 장군을 암살했다.
뒤에 김좌진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한 소식을 전해듣게 되면서 김두한은 단순 골목깡패에서 강경파 우익인사로 거듭나고, 박헌영, 남로당, 여운형 등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박헌영, 남로당, 여운형에 대한 무차별 테러와 공격을 감행했다. 김두한은 뒤에 공산당 토벌 공로로 훈장을 수여받았고, 부친 김좌진 장군의 독립훈장도 수여받았다.
1935년 남목청 저격사건
임시정부의 홍진, 이동녕, 조소앙, 현익철, 김구, 지청천이 모여서 각자의 정당을 통합시키는 회의를 지청천의 거처인 남목청에서 열었는데, 이때 고려공산당에서 보낸 공산주의자 이운환이 임시정부 인사들을 저격했다.
홍진, 지청천 등은 병원으로 옮겨졌고, 현익철은 끝내 병원에서 사망했다.
이운환을 보낸 고려공산당과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 장차관들을 암살하고 자신들이 임시정부를 차지할 목적으로 이운환을 지청천의 거처에 신분을 숨긴 세작으로 들여보냈다.
1949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1949년 4월 조선정판사, 현 한국조폐공사 전신에서 위조지폐가 나왔다는 소문이 돌다가 위조지폐 뭉치가 서울 종로 등에서 발견됐다. 진술을 대강 요약하면 이 위조지폐들은 박헌영의 남로당원이 정치자금을 쓸 목적으로 일과시간 이후에 비밀리에 공산주의자들이 정판사 내부 공산주의인사들과 밀통하여 위조지폐를 대량으로 찍어냈던 것이다.
1950년 조만식 처형
1950년 10월 19일 조만식을 평양에서 처형하였다. 처형이라고도 하고 북한에서 피난하면서 폭격했다고도 하는데. 조만식은 기독교 신자로 한국에서 비폭력 무저항운동과 한국물산 장려운동을 지휘한 한국의 간디로 알려진 평화주의자. 45년 온건좌파의 건국동맹에는 협력했지만 46년 9월 김일성이 조선인민위원회를 만들고, 47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만들자 여기에 반발하여 단독정부 반대를 선언했다가 1947년 감금당했다.
48년 조만식은 자신의 최후를 인식하고 처자와 비서 이윤영을 남으로 보내고 50년 김일성에 의해 친미주의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1952년 김규식 처형
1952년 7월 19일 김규식이 북한에서 처형되었다. 이 김규식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김규식이다. 해방후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유일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했던 김규식은 6.25때 북한에 납북되었다. 그러나 1952년 7월 19일 북한의 김일성은 김규식을 평양에서 처형하였다.
북한독재정권은 52년에 처형한 김규식의 유골을 1990년 북한의 국립묘지인 애국열사릉에 안장해놓고 헛된 민족을 내세워 적화통일을 유도하고 있다.
지청천과 두 아들
지청천은 한국 광복군 총사령관으로 해방후 50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한다. 지청천은 해방후 두 아들은 한국 군대에 입대시켰으며 6.25 전쟁에 한국군 장교로 참여했다가 전사하였다.
--------------------->
극좌폭력노선 추종자들의 원인제공이 우익의 반공화 경향을 유도해간 것이다. 제공좌우익 갈등과 반공이데올로기가 등장한 것은 해방 훨씬 이전의 일이다.
이미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좌진 등에 의해 반공이라는 주제가 형성되었다.
반공혐오증에 걸린 일부우파와 대부분의 좌파들은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1920년대부터 계속된 극좌폭력단에 의한 우익지도자 암살, 테러 등에 대한 원한이 쌓이고 쌓이면서 형성된 것이 반공의식이다. 극좌의 테러에 대한 대응이면서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반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전교조나 해방전후사의 인식, 조정래의 아리랑과 태백산맥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미군정기와 해방직전에 형성된 것이나 친일파가 자신들의 부적절한 과거를 숨기려고 독립운동가를 좌익으로 몰아가면서 형성한 것이거나 6.25 남북전쟁때 형성된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전교조, 해전사, 아리랑, 태백산맥은 반공의식이 6.25때 형성되거나 미군정때나 40년대 형성된 것처럼 거짓말로 학생들과 젊은이들을 속이고 있다.
자의식 없이 자란 80,90년대 세대들 중에는 전교조의 교육으로 대한민국 자체를 부끄러운 역사로 인식하는 학생, 젊은이들이 많다.
반공은 극좌폭력단의 테러의식으로, 좌익세력에 대한 반감으로서 형성된 오래된 우파적 가치기준이다.
>
우익인사의 반공의식의 뿌리는 해방 이전으로까지 올라가며 좌익 중에서도 박헌영, 김원봉 등 극좌파에 의해 우익 지도자와 요인 암살이라는 비상식적인 테러와 지도자 암살을 당하게 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이 짙어지고 1920년대부터 생존을 위한 반공이라는 주제를 형성시켰다.
>
1920년대부터 서서히 형성되어 한세기 지켜온 반공의 덕목. 1공화국 이전부터 생겨난 우익의 덕목인 반공이 해전사나, 서중석, 한홍구의 거짓처럼 어느날 갑자기 쉽게 형성된 반공전통이 아니기 때문에 한민당계와 뉴라이트, 그리고 일부 슨상교, 노빠세작들이 나타나 구우파더러 이해할 생각은 없이 오로지 반공의 덕목을 없애라고 하는데, 반공덕목 없애라고 하는 것은 일방적인 일종의 강요행위인 것이다.
>
>
한국에 온건좌파인 유럽형 사민주의가 나타난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친북좌익 주사파들과 기타 좌파들이 동거하는 현실에서 반공이라는 덕목은 버리라고 골백번 주문을 해도 버려질 수가 없는 것이다.
독립군에도 좌파와 우파가 있었다.
우파는 임시정부 산하 독립군이고 중국 국민당과 연계함.
좌파는 팔로군 산하 조선의용대로 중국 공산당과 연계함.
공산당은 독립군을 공격했고 김좌진장군도 공산당에게 암살당함.
조선의용대는 해방이후 팔로군으로 들어가 6.25때 남침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