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디자이너는 제품이 아니라 회사를 바꾸기도 한다.
지난 2006년 입사해 16년 간 현대자동차그룹의 디자인 팀을 이끌어 온 피터 슈라이어(사진) 사장은 '디자이너의 디자이너'라고 불린다. 디자이너가 일하는 방식에 변화를 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슈라이어 사장은 기아를 세계적인 완성차 브랜드로 올려 놓은 일등공신이다.
독일 바이에른 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아우디와 폭스바겐에서 디자인 총괄 책임자로 일한 그는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의 제안으로 2006년 기아에 입사했다. 이후 ‘타이거 노즈’라는 기아의 디자인 정체성을 만들고 K5, 스팅어, 레이 등 굵직한 히트작들을 배출했다. ‘디자인은 기아(Design by Kia)’ 슬로건을 탄생시킨 그는 새로운 전기차 시대를 겨냥하고 있다.
슈라이어 사장은 24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전기차 시대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는 한국의 거리를 질주하고 있는 현대 아이오닉5, 기아 EV6를 거론하며 “한국은 이미 유럽이나 미국의 자동차 산업을 뛰어넘었다”고 밝혔다.
슈라이어 사장은 “전기차는 디자인과 공학 측면에서 많은 도전과 가능성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전기차는 자동차의 구성을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 내연기관차가 전기차로 바뀌면서 엔진과 트랜스미션, 호스파이프 등은 사라지고 배터리가 중요한 구성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이에 슈라이어 사장은 “전기차만의 플랫폼 덕분에 완전히 새로운 배치를 상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슈라이어 사장은 내연기관차 제조 역사가 긴 독일과 미국 등 전통 자동차 강국보다 한국이 전기차 시장에서 빠르게 치고 나갈 저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과 한국에서 모두 근무해 본 흔치 않은 이력을 갖고 있다.
슈라이어 사장은 “독일은 기존의 방식을 보존하고, 한 발짝씩 나아가고,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디자인을 만드는 반면 한국은 혁신을 추구하고 빠르게 전진하는 특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기차는 슈퍼 찬스다. 현대차·기아가 새 시대를 열 수 있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피터 슈라이어 사장에게 영감을 주는 멘토다. 슈라이어 사장을 영입한 사람은 정몽구 명예회장이지만, 함께 일한 시간은 정의선 회장이 더 길다.
최근 발간된 슈라이어 사장의 일대기인 '디자인 너머'에는 정 회장이 처음 슈라이어 사장을 만난 순간, 둘이 함께 일하며 겪은 인간적인 장면들이 담겨있다. 정 회장은 슈라이어 사장을 영입하면서 그의 가족을 사저에 모두 초대하기도 했다. 아우디와 폭스바겐에서도 끈끈한 가족같은 기업 문화를 좋아했던 슈라이어 사장은 정 회장의 환대에 기아에 대한 소속감을 느꼈다고 강조했다.
슈라이어 사장은 정 회장에 대해 “그가 혁신을 강하게 추진하고 지원하는 것은 현대차의 강점”이라고 힘줘 말했다. 이어 “정 회장은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데 굉장히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고 나의 디자인 철학을 잘 이해해준다”고 설명했다.
슈라이어 사장이 가장 애착을 가진 차, 그리고 아픈 손가락 같은 차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슈라이어 사장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몇 초 간 눈을 굴렸다. 곧이어 나온 대답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모든 차에 최선의 결과를 내고자 하기 때문에 아쉬운 차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아 디자인의 전환점이 된 차는 있다. 지금도 기아 디자인하면 손꼽히는 'K5(수출명 옵티마)'가 대표적이다. K5와 스포티지는 그가 꼽은 '게임 체인저'다.
K5가 있기 전에는 컨셉트카 '키'가 있었다. 키는 지금은 기아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타이거 노즈' 그릴을 처음으로 적용한 차다. 슈라이어 사장은 "최초로 그 차 덕분에 변화가 시작됐는데, 사내에서 디자이너들이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했다.
피터 슈라이어 사장이 인터뷰 도중 그리고 있던 스케치를 들고 웃었다. 연필을 늘 갖고 다니는 슈라이어 사장은 생각나는 아이디어가 있을 때마다 스케치로 옮겨 설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사진제공=현대차그룹
"편안한 마음으로 디자인에 접근하라"
슈라이어 사장이 젊은 디자이너에게 건네는 충고다. 평소 자신의 디자인을 설명할 때 온 몸을 이용한다는 그는 자신의 디자인 철학도 농구공을 주고 받는 몸짓으로 풀어냈다. 그는 “농구는 경직된 스포츠가 아니라 춤을 추듯 역동적이어야 한다. 디자인도 그래야 한다”고 했다.
슈라이어 사장은 단순한 디자이너를 넘어 현대차그룹의 회사 문화를 바꾸고 있다. 그는 책 ‘디자인 너머’를 통해 2006년 입사 당시 현대차 디자인 팀의 혁신 의지를 북돋운 사례를 소개했다. 실패를 두려워하고 새 아이디어 제안을 꺼리던 디자이너들에게 ‘실패해도 된다’는 여유를 줬다. 딱딱하고 경직된 사무실 문화도 편안하게 개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