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이태리 도시국가 이래 가장 놀라운 도시국가 싱가포르 국부
리콴유가 뽑은 "20세기 아시아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지도자 3명중 한명"에 꼽혀
90년대 초반에 싱가포르 대사를 지내던 김성진은
1994년1월19일 당시에 대우그룹 부회장을 역임할 당시에
당시에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난 리콴유와 재회하게 되었다
그때 월간조선을 위하여 인터뷰할 때 이런 질문을 던졌다.
-- 만약 아시아에서 귀하를 제외하고 위대한 지도자를 세 사람만 든다면
누구를 꼽겠습니까.
"먼저 등소평을 꼽겠습니다. 중국이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방향을 전환시켰습니다. 만일 그가 모택동 이후에 정권을 잡지 못했더라면 소련처럼 붕괴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 두번째로는 누구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일본의 요시다시게루를 꼽을 수가 있습니다. 한국전쟁과 냉전이 시작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본이 미국 편에 확실히 서도록 하였습니다.".
-- 이제 마지막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글쎄요. 세번째 사람을 거론하게 되면
한국의 국내정치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 같아서….".
.그때 김영삼은 우리 현대사와 전정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정치공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3대 지도자에 현직 대통령이 싫어하는 이를
포함시켜 괜히 불편한 외교관계를 맺지 않고싶어서였을 것이다
당장 지금같은 민주주의 안했다고 지랄하는 좌좀들이 읽어야할 글
윌리엄 H. 오버홀트가 1990년대에 쓴 ‘중국의 부상(浮上)’
(The Rise of China. Norton. 1993)이란 책은 카터 선거캠프의 참모였고
반한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던 저자가 재평가하면서
근대화와 중국의 변화를 바라보는 눈이 바뀌게 된 과정을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오버홀트는 중국의 근대화 전략이 박정희를 따르고 있다고
자신이 왜 박정희식 근대화 정당성에 설득 당하게 되었나를 고백한다.
이 책 집필 당시 홍콩의 미국 금융회사에서 국제정세 분석가로 일하고 있던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추종하는 운동가로 활약했고
에즈라 보겔 교수의 권유를 받아 하버드에서 중국문화대혁명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을 연구하면 할수록 엄청난 규모의 학살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이 문제를 하버드에서 제기해 보아도 모택동신봉자들이 강단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당시 분위기 때문에 비판만 받았다고 했다.
예일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허드슨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소장은 유명한 미래학자 허먼 칸이었다.
그는 한국의 근대화 정책을 높게 평가하고 있어 젊은 오버홀트씨와는 자주 논쟁을 벌였다
오버홀트씨는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에 한국을 방문하고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농촌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때의 충격을 그는 이 책에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악독한 독재자로 알고 있었던 정권이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며
아주 효율적으로 국가를 근대화하고 있는 모습은, 필리핀에서 목격한
한심한 미국식 근대화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 경험이 계기가 되어 그는 아시아의 권위주의적 정부를 바라보는
미국학자, 정치인, 기자들의 위선적인 관점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1976년에 그는 카터후보의 선거참모로 들어가
對아시아정책 그룹을 이끌게 되었다.
한국을 방문한 뒤 생각이 달라진 그에게 있어서는
서구식 우월의식으로 꽉 찬
카터 진영의 참모들이 철없는 사람들로 비쳐졌다.
그때 카터 진영에서는 미군철수를 공약함으로써 독재정권을 응징하는
인권외교의 챔피언으로서 카터의 이미지를 조작하려고 했는데
이게 오버홀터에게는 바보짓으로 보였다.
그는 미국식 인권개념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역사와 문화의 발전단계 차이를 무시한 미국식 오만이라고 보았다.
(좌좀들과 이나라는 사대주의자학사관에 빠져든
망국식 역사관에 점령당했음)
이 경험 때문에 그는 1989년6월의 천안문사건 이후
중국의 인권문제와 중국에 대한 最惠國(최혜국) 대우를 연계시키려는
미국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서구 이념은 정치발전은 항상 경제발전보다 선행하거나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는 것이고 아시아의 권위주의 지도자들은 정치적 자유화 없이도 경제적 자유화가 계속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세계의 근현대사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민주화를 먼저 하고
경제발전을 하는 식으로 성공적인 전환을 이룩한 나라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패한 모델은 학자들과 언론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왔고
(좌좀들이 박통 민주주의니 독재니 지랄하는 건
한번도 이뤄지지 않았던 역사를 평가하는 기준부터가 틀려먹은 것 의미)
서구의 원조를 받아왔다.
이런 원조는 정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뒷문으로 빠져나가 버려
자본의 도피만 발생할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태평양 연안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에는
먼저 권위적 정부가 들어서서
근대적인 제도를 만들고 경제를 자유화하여 시민계층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자립을 이루고 교육받은 시민계층들이 대량으로 양산되어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게되어 타협을 이루어 현대적민주국가로 변화된다>
이 책에서 오버홀트는 후진국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하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좌좀비들 필독)
첫째 후진국엔 선동으로부터 국익을 지켜낼 수 있는
강력하고 현대화된 국가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후진국엔 개혁을 저지하는 기득권 세력은 강하나
이를 극복하고 추진할 국가주의 세력은 약하다.
셋째, 후진국엔 분별력을 갖춘 교육 받은 중산층이 약하다.
오버홀트는, 이 세 가지를 합쳐서 후진국에서
민주주의의 정착을 불가능하게 하는 문제를
'인기주의의 장벽'(Populist Barrier)라고 이름지었다.
오버홀트는 박정희가 바로 이 포퓰리즘을 꺾고
현대적 민주주의로 가는 기반을 만들어낸 제도와 중산층과
국가적 개혁을 이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민주팔이들은 그저 밥숫가락만 앉고 성공한 꼴에 불과함)
<그는 집권하자말자 군사비를 삭감했다.
북한의 위협이 있음에도
이런 일은 민간 정치인들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적대관계에 있던 일본과 수교했다.
이것은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회주의적 향이 강하고 외국인 혐오증이 심한 군중심리를 누르고
외자유치와 무역을 장려했다.
그는 수출을 지원하기 위하여 환율을 인하했다.
이는 남미의 정부라면 할 수 없는 조치이다.
이 나라들의 지배층은 환율을 이용하여
사치품을 수입하고 외국에서 부동산을 사재기하기 때문에.
또 외국인투자를 환영하고 원자재와 기계류에 대한 관세를 내려
한국기업의 경쟁력을 높였다.
이런 개혁은 사회주의적 성향의 지식인과 과보호에 안주하는
기업인으로부터 동시반발을 살 수 있는 일이라
현대식 민주주의를 채용하는 開途國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즉 좌좀빨갱이들이 민주주의 어쩌고 개거품무는걸 진작에 했다면
아무리 잘해봤자 오늘날 파키스탄 수준에 머물러있단 의미)
현대식 국가기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국군은 미군보다도 더 효율적인 집단이 되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장관과 은행가들을 추방하고 연구소를 만들어
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을 초빙했다.
이들이 고위 관료가 되도록 하여 세계에서 가장 능률적이고 날씬한 정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대통령의 개혁이 1987년의 6.29가 가능하도록한 조건들을 만들어놓았다.>
1970년대에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감동적인
박정희식 근대화를 목격한 오버홀트는
동아시아식 개발방식의 타당성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 새로운 시각으로써 고르바초프 개혁 개방의 실패도 예측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