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이승만은 신탁 통치에 반대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실재로 이승만이 비판 받은 것은 미국에 의한 위임통치 청원 사건과, 신탁통치보다 급수가 높은 미군정과 연관된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 이승만은 신탁 통치에 찬성적 성향을 가진것으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실제 신동아에 기고했던 강원용 목사의 글에서도 이와 연관된 내용이 나옵니다.
"광복후 저는 그분을(이승만)을 거의 광신도처럼 지지했어요.
이승만이 일제 시대에 해외에서 한반도의 신탁 통치를 주장한 사람이다라고 하지만 이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제가 알기로 이박사는 신탁통치에 대해 김구 선생이나 김규식 박사처럼 단호하게 반대하지 않았어요. 그는 신탁통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겁니다." )
위임통치 청원 사건은 1920년대에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미국에 의한 위임통치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이것이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집정관 총재직에서 탄핵되는 중요한 이유가 돼기도 했죠.
실제 이 사건으로 인해서 이승만은 친탁론자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이 청원의 내용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6~7단락에 해당하는 "연합국 열강이 장래에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현재와 같은 일본의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에 두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저희들의 자유 염원을 평화회의 석상에서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는 바입니다." 라는 구절입니다.
여기에 하와이에서 이승만과 노선 차이로 충돌하고 있던 박용만이 이 청원서의 내용에 논란의 불을 지폈고, 연합통신사에 국제연맹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해줄 때까지
미국의 지도를 받는 위임통치국이 되기를 바란다"란 신문기사가 나오면서 사건이 시작되었죠.
이 때 박용만과 연계가 강했던 신채호가 "이승만은 나를 일본에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매국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찾지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이 사건으로 인해 갈등이 불거집니다.
결국 사건의 여파가 커지게 되자, 이승만은 자신은 한 것이 없으며, 단지 서명만 했을 뿐이라고 입장을 후퇴하지만 논란의 불길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하지만 같이 서명했던 정한경의 주장에 따르면, 그 당시 중꿔의 정치고문 출신의 제레미 젠크스의 권고에서 시작된 것이며, 미국의 유력인사, 한중
양국의 유력한 친우들, 국제법 전문가들의 권고를 받고, 국민회 중앙총회의 행정위원회에서 논의, 승인을 거친 후 이승만이 국제법에 따라 최종 검토,
수정한 것이라 하소연합니다.
또한 안창호, 이광수에게 편지로, 이승만이 그대로 실행하라 하므로 이를 인정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즉 결국 이 청원서는 이승만이 직접 작성하지는 않았더라도, 그 내용을 충분히 숙지했고, 이를 인정했으며, 수정까지 한것으로 보아야 할 듯 합니다.
이후 1926년 정한경은 이광수에게 편지로, "위임통치를 잠시라고 하더라도 제기한 오인은 오늘에 그 과실을 피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말을 제기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란 말로 어눌하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합니다.
미군정과 이승만이 연관된 사건은 앞부분의 강원용 목사의 말에 신빙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미군정은 1945년 9월 9일 한국 주둔 일본 총독의 항복과 동시에 시작됩니다.
이 때 미군정은 김구와 접촉하였으나, 완고하게 임시정부 정통론을 주장했던 김구와 거리가 멀어지고,
미군정에 협조적이던 한민당과 이승만이 연대하도록 주선합니다.
실제 철저한 친미주의자이자, 한국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국가종교로서 국민들을 개선시켜야 한다고 믿었던
이승만은 미군정과 지지세력이 약했던 한민당과 연계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합니다.
이 후 그 유명한 신탁통치 오보 사건이 나옵니다.
즉 실제 신탁을 지지하던 미국과, 선 정부수립,후 신탁 소련의 입장이 정 반대로 일반 국민들에게 전해졌던 겁니다.
(그 때는 아직 결정되기 전이었던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오보 사건은 그 당시 한민당, 송진우, 김성수의 정치 세력의 근원지인 동아일보에서 최초 보도 되었고, 일부 현대사 연구자들이 이 오보의
배후로 미군정이 있음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실제 그 당시 미군정에서는 기사 내용들을 철저히 검열해왔는데 유독 이 오보만을 용인했다는 점.)
목적은 일제치하에서 고생하던, 한국민들이 신탁통치에 반대할것이란 것이 감성적으로 자명하고, 이 오보로 인해, 미국과 국내 친미정치세력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였다는 주장입니다.
결국 이 오보로 인해서, 일제청산을 위한 민족주의 운동이 오보 사건 이후 6개월만에 반공/반소를 내건 좌우 이념 갈등으로
변경되어졌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으며, 반탁운동이 실제 친탁을 표방했던 미국에 대한 저항 운동이라기 보다는 반공/반소운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해야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미군정은 이 무렵 한국에 신탁통치를 강요하고자 한 것은 소련이며 따라서 소련이 이에 대해 비난받아야 한다는 믿음을 한국인들 사이에 조장시키려 노력하였고, 국무부도 비슷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또한 "하지"의 "한민당은 반탁의 깃발 뒤에서 친일파라는 비난을 피하였고, 자신들의 정치적 복권을 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어느 면에선 가장 큰 수혜자였다."
“흥미있는 것은 반탁소동으로 빨갱이와 백파가 균형을 이루게 되었고, 양쪽이 다 우리에게 도와달라고 우는 소리를 하게 되었다"라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결국 신탁통치와 관련된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는 소련측의 주장이 원안이 되고 거기에 수정안을 미국이 제시하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일종의 절충안)
즉 위의 위임통치 청원 사건과, 미군정과 연관된 사건등으로 인해서, 이승만은 실제 친탁을 주장해왔지만,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반탁운동을 했다는
의문을 사게 됩니다. 즉 그 진정성에서 의문을 사게 된것은 이승만의 행적으로 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탁과 반탁을 단순하게 좌와 우의 개념으로 분리해서 비난하는 무식한짓은 좀 그만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당시 신탁 찬성을 했던 사회주의자가 소련의 지령에 놀아난 매국노라고 대차게 까이긴 했지만,
단지 동아일보에서, 신탁,반탁을 모스크바 3상회의의 요점이라고 오보해서 비롯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의 일종일 뿐이고.
실제는 신탁통치가 아니라, 우리 손으로 임시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이 3상회의 결정의 요점이었고, 위 결의안에 따르면, 임시정부의 협력이
필수 조건으로 명시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단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고, 임시정부가 협력을 거부하면 그 순간 신탁통치는 무산된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우파였던 송진우도 어눌하게 신탁을 찬성했고
(미군정의 눈치를 봄,김구에게 친탁찬성자라고 대차게 욕먹음),
중도파인 여운형과 안재흥도 선임정수립,후반탁을 주장하며, 극렬한 반탁운동을 반대했고, 김규식은 처음
반탁을 주장하다, 현실성이 없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4줄 요약
1. 이승만은 반탁을 주장.
2. 하지만 일제 시대 이승만은 미국에 의한 위임청탁을 청원, 후 미군정에 협력. 이로 인해 친탁성향이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반탁을 주장.
3. 실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주요 요점은 한국에 임시정부 수립(5년간 신탁통치는 옵션), 신탁/반탁은 동아일보 오보로 격렬화.
4. 신탁/반탁만이 존재했던 그당시 상황에서 우파에서도 신탁 찬성자들이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