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우선(鶴羽船). 조선이 서양오랑캐의 철갑선을 물리치기 위해 만든 군함이다. 이 군함의 제작과정이나 재료 등은 참으로 기발하였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서양세력을 막아낸 흥선대원군이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가 침입한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사용한 배가 <증기선>이라는 것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대원군은 앞으로 계속 침략할 서양에 맞서기 위해서는 서양보다 우수한 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서양의 증기선을 물리칠 묘안을 모집하였다. 이때 여러가지 안이 나왔다. 그 중에 학우선이란 것이 있었다. 학우선이란 학의 깃털로 만든 전투함이다. 가벼운 학의 털로 몸체를 만들고 매미 배처럼 주름잡힌 고복(鼓腹)의 신축작용으로 바람을 일으켜 떠서 날기도 하고, 물에도 뜨는 공수양용(空水兩用)이었다. 새의 깃털로 배를 만들면 배가 가벼워 민첩하게 행동할 수 있으며 또 총탄으로 구멍이 뚫리더라도 선체가 새털이기 때문에 금방 아물어지니까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흥선대원군은 전국의 사냥꾼에게 학을 잡아 그 깃털을 공출하라고 명령하였다. 사냥꾼들은 학을 잡아 그 깃털을 모으고 국가에 깃털을 보냈다. 그 새의 깃털에 아교로 붙여 배를 만들었다. 대원군은 이 배를 보고 만족하였다. 망원정 앞 서강(西江)에서 그 배를 시험하였다. 군함의 진수식이었다. 배를 물에 띄었다. 흥선대원군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시선을 그 배에 집중하였다. “어렵쇼!” “어렵쇼!” 여기저기서 비명이었다. 배를 띄우지 마자 물이 배에 새들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배는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배에 타고 있던 수군장수와 병사를 구출하느라 야단법석이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에게는 크나큰 실망이었다. 그는 학우선의 진수식으로 큰 고배를 마신 셈이다.
서양 오랑캐를 막아야 한다는 그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대원군은 또 한 번 시도한다.
“반상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뛰어난 재주를 가진 자로 나라에
이익이 될 수 있는 인물이면 벼슬을 주어서라도 긴히 쓰리라!“
대원군의 병기 개혁의 의지를 다시한번 굳히는 특명이 하달되었다.
전국에서 귀재를 불러들였다. 신병기 제조에 심혈을 기울였다.
‘묘한 기계를 잘 만진다’는 김기두(金箕斗)와 강 윤(姜 潤)이 발탁되었다.
그들은 특급기능사로 중용했다.
조선에서는 이미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대동강에서 격파한 적이 있었다.
그 배는 불에 탔지만 기관만큼은 그대로였다고 한다.
제너럴 셔먼호의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철갑선을 만들었다.
망원정 앞 서강에서 철갑 군함의 진수식이 열렸다. 군함은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군함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와아아!“ ”히아아!“
망원정과 강둑 여기저기서 탄성이었다. 배는 몇 미터 나가다가 멈추어 버렸다.
한 시간 가까이 기관을 돌렸지만 겨우 열자 정도 움직이었다고 한다.
전국에서 수십만 량의 쇠와 구리를 만든 국내 최초의 증기기관 군함의 진수식이었다.
그 결과는 실패였다. 서양의 화륜선을 처음 본 김기두이었다. 그가 그 배의 운전법을 알 턱이 없었다.
문제는 연료였다. 셔먼호는 석탄을 때었다. 이 철갑선은 숯을 때어 시운전을 했다.
배가 무거운데다 힘이 약해 여남은 발짝 전진하다가 가라앉고 말았다.
흥선대원군이 집정하면서 프랑스 선교사들을 처형한 데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동양함대의 강화도 기습이 있자 흥선대원군은 그 총기의 화력에 대항하는 무비(武備)에 골몰하게 됐다. 그래서 그 아이디어를 내외에 널리 공모했고, 기상천외의 비책들을 들고 흥선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 문턱을 닳게 했다. 그 비책을 수용하여 환술(幻術)과 차력(借力)을 하는 자들을 끌어모아 차력대(借力隊)라는 특수부대를 창설하기도 했다. 대원군 집정시 운현궁에 전해오는 일화로는 이 곳 뜰에서 벌어졌던 방탄복 실험이야기가 있다. 흥선대원군은 1866년부터 7년에 걸쳐 천주교에 대한 대 박해를 가하였다. 이를 응징하고자 프랑스의 동양함대가 1866년 강화에서 도발한 병인양요(丙寅洋擾)는 흥선대원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서양의 무력에 대항할 방책을 팔도에 공모하였다. 온갖 아이디어가 속출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는 서양총의 총탄이 뚫을 수 없는 방탄복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원리는 간단하였다. 서양총의 총탄이 뚫을 수 없을만한 두께로 무명베를 겹쳐 방탄복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운현궁 동남쪽 뜰에서 이 방탄복 실험이 벌어졌다. 먼저 아홉 겹으로 겹친 베를 향해 서양 총을 쏘아보니 뚫고 나간지라 한 겹을 더해서 쏘아보고 또 한 겹 더해 쏘아보길 거듭하였다. 열두 겹 째에야 뚫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안전하게 한 겹 더 보태 열세 겹의 방탄복을 만들었다. 그 두꺼운 방탄복에 투구와 배갑을 입고 보니 무겁고 둔하여 제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그 보다 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운현궁에서 탄생한 방탄복은 실전에서 사용되었다.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미군측의 기록을 보면, 조선병사들이 입은 군복은 총탄을 막기 위해 1인치 이상 두꺼운데 이 옷에 불이 붙으면 꺼지지도 않고 끌 수도 없어 불에 타죽는 병사가 많았다는 것이다. 화상을 면하고자 포대 아래 바다로 뛰어드는 병사도 많았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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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임.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슬픈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