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머리카락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 집에 처음 온 날, 큰아버지가 문을 따고 열쇠를 건네주며 떠나신 후 이 집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거실에 온통 긴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는 걸 봤다.
당일은 일단 내 짐 푸는 게 급선무였으므로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모아 내다버렸는데,
문제는 그 날 저녁부터 이상하게 한 두가닥씩 발견되는 머리카락이었다.
" 미친.. 아니, 세를 안 놨다며? 왜 거짓말을 하셨지? "
세를 여태껏 놓은 적이 없다는 집인데 어째서 머리카락이 이렇게 많이 나올까,
그 말은 곧 세를 놨었는데 괜히 나에게 주면서 생색을 내기 위해 위장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긴 머리카락이 이렇게 곳곳에서 나오겠는가.
" 아나, 또 나왔네.. "
처음엔 대충 넘겼던 머리카락도 시도 때도 없이 한 두가닥씩 손에 잡히고 발에 밟히니
여간 짜증나는 게 아니었다. 결국 나는 다음 날 부엌부터 시작해서 2층까지 쓸고 닦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머리카락을 치워버렸다.
" 잘 지내라, 야. 나 바로 옆 도시인거 알지? 다음엔 니가 와라. 고기 한 번 썰자. "
" 그래. 잘 가라. "
" 그리고 임마, 제수씨 생겼으면 좀 소개 시켜줘, 뭘 그리 꼭 꼭 숨겨? 나쁜 일도 아닌데. "
" 그런 거 아니래도. 예전에 살던 사람이겠지. "
" 그러냐..? 아무튼 너 진짜 여자 없는거면 조만간 동생 친구 소개시켜줄게. 아무튼 간다. "
" 그래. 연락할게! "
친구는 가면서까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친구가 머리카락을 여러번 발견한 탓에 '자연스레 떨어진 것 치고는 너무 많다'고 생각한 탓이겠지.
" ... "
친구를 보내고 현관문을 닫고 돌아서자마자 내 발 앞에 머리카락 하나가 보였다.
" 아, 진짜..! "
나는 화가 났고, 한 편으론 조금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대체 전 주인은 탈모라도 걸렸단 말인가? 아니면 여기서 머리라도 깎았나?
나는 바로 그 날 저녁 큰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ㅡ 여보세요?
" 삼촌, 전데요. 이 집 진짜 세 안 준 거 맞아요?
ㅡ 뭔 소리야. 너 봤잖어, 아무 것도 없는거. 시계도 너 온대서 달아놓은거야.
" 그럼, 집에 왜 이렇게 머리카락이 많아요? "
ㅡ 뭐?
" 시치미 떼지 마세요, 이 집에 전에 여자 살았죠? 맨날 머리카락 나와요. "
ㅡ 이 녀석아, 네 머리카락이겠지. 너도 네 아빠 따라서 머리 까지냐?
" 아뇨, 진짜 긴 머리카락이 나온다니까요? 한두가닥이 아니에요. "
ㅡ 야. 진짜 머리카락이 나온다고? 여자 머리카락
" 네, 제 머리카락이 절대 아니라니까요. 제 친구도 봤어요.
ㅡ 이상하네.. 일단 되는대로 치우고 살아봐, 나도 거기 제대로 들여다 본 적은 없어서.
" 삼촌도 모르신다고요? "
ㅡ 그게, 나도 유산으로 물려받았잖아. 네 할아버지도 늙으막엔 시골 사셨고.
나 살아야겠다 싶어서 내가 세는 안 줬어, 할아버지도 세는 안 준 걸로 알거든.
니가 좀 불편하겠지만 머리카락은 치우고 살아라. 치우다보면 안 나오겠지. 안 그러냐?
" 어쩔 수 없네요. 삼촌 말대로 그냥 다 치워야겠어요. 근데 저번에 한 번 싹 치웠었어요.
ㅡ 임마, 니가 야무지게 청소를 했어야지. 끊어, 삼촌 잘란다.
" 네, 삼촌. 안녕히주무세요. 괜히 전화해서 죄송해요. "
ㅡ 아냐 아냐. 연락 자주 해라.
집주인인 큰아버지와 통화를 했지만 알아낸 건 없었다, 달라진 것도 없었다.
그 날 잠에 들 때까지 나는 적어도 열 개 이상의 머리카락을 주워다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음 날 아침이 시작되고, 나는 머리카락 따위에 신경 쓸 겨를 없이 바삐 출근했다.
사회 초년생답게 바쁜 하루를 보내고, 저녁엔 직장 선배와 술자리를 한 번 가지곤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술자리에서 선배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선배는 술에 취해 꼬부랑거리는 발음으로 얘기했었다.
' 야야야.. 머리카락이란 게, 땅에서 솟는 게 아니야.. 위에서, 툭, 요렇게 떨어진다고..
그럼, 뭐겠냐? 위에서 떨어진 거 아냐.. 위를 잘 찾아봐, 위를.. '
위를 찾아보라니? 천장에 여자라도 들러붙어있단 말인가?
오히려 그게 더 무섭잖아. 괜히 집 앞에 들어서자 선배의 농담이 기괴하게 들렸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 불을 키고, 대충 옷을 정리하고 씻으려고 욕실로 향했다.
" 흐음.. "
쪼르르르, 씻기 전에 소변을 누며 취기가 잔뜩 오른 내 얼굴을 확인하려는 찰나
내 정면의 거울, 내 뒷편.. 즉 말하자면 거실에 뭔가 지나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 c발 "
나는 몸이 얼어붙는 듯 했다.
' 위에서 떨어진 거 아냐 '
갑작스레 선배의 말이 떠오르며 나는 변기물을 내리지도 못 했다.
" 누구야. c발. 당장 나와. "
나는 속으론 겁에 질려있었지만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숨긴 채
잔뜩 허세를 부리며 거실로 나왔다. 하지만 집 어디에도 다른 사람 따위는 없었다.
이상했다. 분명 변기 위에 있는 거울 뒷편으로 뭔가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나는 발견했다.
머리카락 3가닥, 그것도 내가 소변으로 누러 가기 전에 양말을 벗어던져놓은 곳 옆에.
아까 양말을 벗으며 확실히 살펴보았다. 원래 머리카락 따위는 없었다.
나는 미칠 노릇이었다.
" c발, 누구냐고! "
그 순간 '위에서 떨어진 거 아니냐?'는 선배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나는 울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게슴츠레 실눈을 뜬 채 겨우 천장을 올려다봤다.
휴, 다행히 아무 것도 없었다.
난 온 몸에 힘이 빠져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3가닥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 위.. 위.. 위라.. 천장에는 아무 것도 없다, 더 위인 2층으로 간다면..? '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면 다른 구역 없이 공부방으로 쓰는 작은 방 하나가 나온다.
나는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던 중 뭔가 거미줄 같은게 얼굴을 감싸는 느낌을 받았다.
" 으악, 뭐야. "
소스라치게 놀란 내가 얼굴 위로 떨어진 그걸 받아드니, 그건 머리카락이었다.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다행히 이번에도 여자 귀신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이유를 모르게 튀어나온 손잡이를 발견했다.
비스듬한 계단 천장에는 아마 여지껏 삼촌도 나도 모르고 있었던 공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 후우, 하나, 둘, .... 세..엣 "
나는 하나 둘 셋을 외치며 손잡이를 벌컥 열었다.
그제서야 먼지가 쌓여 잘 보이지 않았던 테두리가 눈에 드러나며 다락방이 열렸다.
2층방 말고도 창고 방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 쿨럭 쿨럭, 아오.. 먼지.. "
어두운 밤이라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폰 후레쉬를 켜서 안을 비추었다.
" 이게 뭐야... "
다락방 안은 가발 천지였다.
하나도 빠짐없이 긴 생머리의 가발,
주인 없는 가발이 셀 수도 없이 들어가있었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아무에게도 세를 놓지 않은 집의 다락방에 가발이 가득 들어차있다니.
원래 할아버지에게 돈을 꾼 사람이 가발업자였던걸까.
헌데 머리카락의 정체는 가발이라고 치고,
그럼 다락방에 가득 들어찬 가발의 머리카락이 왜 집안 곳곳에서 발견되는걸까.
그것도 치워도 치워도, 한 두가닥씩 계속 보이는걸까.
나는 결국 그 해답을 구하지 못한 채 방으로 돌아가 잠에 들었다.
더 이상 지체하기엔 내일 출근도 해야했고, 무엇보다 술에 아직 취한채라 몸이 견디질 못 했기 때문이다.
일이 끝나고, 눈 코 뜰새 없는 신입치곤 의외로 시간이 남는 저녁이었다.
왠만하면 함께 하는 술자리도 마다한 채 나는 집으로 곧장 향했다.
집에 놔둔 노트북에 중요한 영상이 담겨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노트북에 설치해놓은 캠 카메라,
그리고 화장실 거울 옆에 녹화를 누르고 켜둔 캠코더,
이 두 전자기기 속에 그간 나를 괴롭혔던 '머리카락'의 실체가 담겨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발견한 머리카락 일곱가닥이 그 판단의 신빙성을 높여줬다.
다음은 노트북에 녹화된 영상이다.
[1] 평범한 집..
[2] 여전히 평범한 집, 그러다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다음 화면부터 나는 까무라칠 뻔 했다.
생머리 가발 하나가 계단을 내려오듯 둥둥 뜬 채로 들썩이며 내려오고 있었다.
가발은 마치 살아있는 듯이 이리저리를 두리번거리고는,
화장실 거울 앞으로 가서 거울에 이리저리 가발을 비추고 있었다.
" 뭐야.. "
나는 화장실로 내달려 캠코더에 기록된 영상을 틀어보았다.
마찬가지로 캠코더에는 화장실 거울 앞으로 가발이 들어오고,
가발이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캠코더로 다가와 캠코더 화면을 완전히 까맣게 가리는 장면이 나왔다.
" 이거 뭐야.. "
나는 믿고 싶지 않았다.
이 집은 귀신에 씌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 순간 나는 언뜻 거울 뒤로 다시금 무언가가 스치듯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 날 집을 뛰쳐나가 인근 찜질방에서 하루를 지냈다.
도저히 그 날은 집에서 잘 수 없었다.
2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