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중앙일보에 올라온 배명복칼럼입니다.
“당신은 어느 편인가?” “적인가 동지인가?”이런 질문을 강요받거나 강요받는다고 느낄 때 나는 서글퍼진다. 불편하고 불쾌하다. 양쪽으로 편을 갈라 이쪽인지, 저쪽인지 묻는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는 난처하고, 때론 어처구니없는 상황 말이다. 양심과 사상을 검증받는 듯한 꺼림칙한 느낌을 넘어 지성과 지능이 모욕당하는 처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헌법적 가치로 보장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양심 고백을 강요받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천안함 사건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정부가 어제 국회에 제출한 체포동의안에 적시된 내용대로라면 이석기(통합진보당 국회의원)는 명백한 ‘빨갱이’다. 변명의 여지 없는 골수 종북주의자다. 북한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며 말투까지 북한 것을 흉내 냈다. 그런 자가 법의 맹점을 이용해 버젓이 금배지를 달고 국회의원으로 활동해 왔다는 사실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그를 비호하고 변호할 대한민국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정해진 법에 따라 심판 받고 응분의 죗값을 치러야 한다. 여기까지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문제다. 이쪽인지, 저쪽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하지만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그와 그를 추종하는 몇몇 인사에게 적용한 내란음모 혐의에 이르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들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유치찬란한 주장을 근거로 그들을 과연 국가 전복과 변란을 꾀한, 극악무도한 반역분자들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현실성 및 실현가능성과는 워낙 거리가 먼 황당무계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대선 개입 논란으로 국정원 개혁이 화두로 대두돼 있는 상황에서 내란음모라는 초대형 공안사건이 터진 점을 주목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정원의 존재 이유를 대중에 각인시킴으로써 개혁의 칼날을 비켜가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국정원에 의심의 칼을 들이대긴 어렵게 돼 있다. 이석기와 그 일당이 저지른 범죄 혐의가 너무나 명명백백하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의도에 의심이 들어도 대놓고 문제를 제기하기 힘든 이 상황은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곤혹스러운 상황일지 모른다. 이럴 땐 신중(愼重)이 최선이다. 닭 모이 주듯 공안당국이 던져주는 곁가지 정보에 현혹돼선 안 된다. 불순한 의도에 놀아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최대한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법부를 믿고 법원의 판단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석기 건과 별개로 당장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는 문제가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이다. 천안함 사건은 우리 사회의 트라우마다.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라는 정부 발표를 믿느냐 안 믿느냐는 합리와 이성을 떠나 신념의 문제이면서 사상 검증의 수단이 되어 버렸다. 종북주의자로 낙인찍힐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못 믿는다는 말을 함부로 하기 힘들게 돼 있다. 헌법재판관 후보로 나온 사람도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믿느냐”는 질문을 피해가지 못했다. “정부 발표를 신뢰하지만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신할 순 없다”고 대답하는 바람에 그는 인사청문회의 벽을 넘지 못했다.
‘천안함 프로젝트’는 정부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기 어려운 우리 사회의 소통 문제를 다룬 영화라고 제작진은 설명한다. 영화는 ‘좌초설’과 ‘좌초 후 충돌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증언과 이를 둘러싼 법정의 명예훼손 공방을 다루고 있다.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12세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았지만 사실을 왜곡하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해군과 유가족들이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면서 막판 제동이 걸려 있다. 현재 의정부지법 고양지원에서 심리가 진행 중이다. 예고된 5일 개봉 일정에 맞추려면 오늘 내일 결론을 내야 한다.
9·11 테러에 관한 음모론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화씨 911’은 미국에서 아무 문제 없이 개봉됐다. 미 정부와 유가족 누구도 제동을 걸지 않았다.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던 병사 한 명이 마이클 무어 감독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지만 패소했다. 선택과 평가는 관객의 몫이다. 상영조차 못하게 막는 것은 표현과 창작의 자유 침해다.
터무니없는 질문이라고 못하게 막는다면 소통은 불가능하다.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겉으론 평화로울지 몰라도 기초가 허약한 불안한 사회다. 어느 편인지 묻지 않고, 시끄러워도 의심을 용납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그런 사회라야 창조도 가능하다. 창조의 원동력인 인문학의 본질은 의심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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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생이 보수님들에게 부탁드릴것은 물론 이건 보수로써 좋은 먹잇감일수 있고 나름
열폭할수도 있는 소재입니다만 조금 더 이성을 찾고 냉정해져 함부로 사상검증 어쩌고 하는 짓은
말았으면 합니다. 진보의 제1덕목이 용기라면 보수의 제1 덕목은 책임감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