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광주약속 이행 논란, 수권 능력 입증으로 돌파해야… 호남 민심 안에 더민주 중심 집권지지 여전히 존재
20대 총선에서 낙선한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가 <월간중앙>과의 인터뷰를 통해 패배의 소회와 향후 정치적 포부를 밝혔다. 그는 고졸 출신 첫 삼성전자 여성 임원으로 더민주에 영입됐다. 그러나 정치거물 천정배 국민의당 공동대표의 벽을 넘기엔 역부족이었다. 천정배-양향자 광주 서을 대결은 ‘다윗과 골리앗’ 싸움에 비유됐다. 천 대표와의 대결에서 30% 이상 득표율을 기록하며 ‘전국적 지명도’를 얻는 데는 성공했다. 정치에 입문한 지 수개월밖에 안 되는 신인 입장에선 작지 않은 수확이라 할 수도 있다.
“앙겔라 메르켈 바라보며 호남 대표하는 정치인 되겠다”
문재인 전 대표는 4·13총선을 앞두고 양 전 상무를 영입하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였다. 고민의 시간도 길었던 만큼 권유의 강도도 거셌다고 한다. 문 전 대표는 총선 직전 광주 유세에서 “양향자 후보는 제가 당 대표 마지막 무렵 영입한 광주의 딸”이라며 “온갖 차별, 어려움을 다 극복하고 세계적인 기업 삼성에서 상무까지 승진한 정말 뛰어난 여성”이란 평가로 그를 북돋았다.
양 전 상무는 1985년 광주여상을 졸업한 후 삼성반도체에 입사했다. 메모리 설계실에서 연구원 보조로 일했다. “30명이었던 입사동기가 5년 후 한 명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회고다. 그만큼 힘든 일이었다. 도면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단순 업무였지만 그는 왜 그렇게 그려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바로 이런 집요한 탐구욕이 그를 동료와 구별했다. “네 까짓 게 알아서 뭐하느냐”는 타박에도 그는 억척스럽게 공부했다. 일본어를 공부할 때도 그랬다. 겁도 없이 사내 일본어 학습반에 들어갔다. 고졸인 네가 공부할 수 있겠느냐는 강사의 비아냥거림과 대졸들의 텃세를 견디며 공부했다.
삼성전자에선 남들보다 1년 빠른 ‘발탁 승진’주말에도 기숙사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결국 가장 먼저 일본어 자격증을 땄다. 일본어를 기막히게 하는 여사원이 있다는 소문이 났다. 연구원들이 일본 서적을 들고 찾아왔다. 자료를 밤새워 번역하면 반도체 설계에 대한 이해는 덤으로 따라왔다. 어느덧 반도체 설계 업무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 됐다. 삼성의 첫 번째 고졸 엔지니어가 됐고, 여자는 안 뽑는다는 사내 대학에 기어코 입학했다.
영어+일어+중국어+디지털정보학과를 3년에 조기졸업하고 반도체공학 학사를 받았다. 한국디지털대 인문학 학사, 성균관대 전기전자컴퓨터공학 석사까지 취득했다. 메모리 설계 전문가로 메모리 제품설계 자동화 추진을 통해 개발기간 단축에 기여했다. 마침내 ‘삼성의 별’이라는 임원을 달았다. 남들보다 1년이나 빠른 ‘발탁승진’이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야당으로의 정권교체 염원이 내가 읽은 호남민심의 핵심”이라면서 “김종인-문재인 콤비가 DJP 연합 이후 최강의 집권조합”이란 자신의 대선관을 밝혔다. 문재인 전 대표가 공들여 영입한 중심인물이란 점에서 그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양향자 개인의 발언일 수도 있지만, 김종인 현 대표와 더 이상의 갈등 국면을 피하고 싶은 문 전 대표 진영의 희망이 반영된 발언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인터뷰는 5월 9일 중앙일보 본사에서 2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낙선했지만 표정은 밝다. 이제 담담하게 마음을 추스른 건가?“누구보다도 지기 싫어하지만, 항상 패배를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아왔다. 선거 기간 압축적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파노라마처럼 그 순간들이 뇌리를 스친다.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러나 패배한 것은 아프다. 엄청나게 아프다.”
천정배라는 거물을 만나 싸웠다. 처음부터 패배를 무릅쓴 것인가?“아니다. 이길 수 있다고 보고 끝까지 치열하게 싸웠다. 천 대표는 내리막길이엇고, 나는 한참 올라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는 골든크로스가 이뤄질 것 같았다. 광주의 정치 프레임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미 형성된 선거구도는 너무도 견고했다.”
비례대표 1번 감이란 말도 있었다. 광주보다는 쉬운 수도권 출마의 길도 있었다. 혹시 문 전 대표가 광주 지역 출마를 간곡히 권유했던 것인가?“아니다. 문 전 대표는 출마 지역이나 형식에 대해서는 일절 말씀이 없으셨다. 다만 더민주가 광주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나를 영입한다고 했을 때, 내가 광주 이외의 지역에 출마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했다. 왜냐면 내가 광주를 회피한다면 그것은 당이 광주를 포기한다는 메시지로 해석될 것이기 때문이다. 광주 출마는 저와 당이 이심전심으로 확인해 결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삼성전자 상무는 보통 자리가 아닌데, 박차고 나와 순식간에 정치인이 됐다.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텐데.“더민주의 권유가 집요했다. 그러나 결국 결단은 나의 몫이었다. 권유받은 사실은 남편에게도 오랫동안 숨겼다. 더민주가 인재영입을 극도의 보안 속에 추진했기 때문에 그 누구하고도 상의할 수 없었다. 처음엔 내가 갈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삼성전자 상무가 된 후 삼성에서의 30년 비전을 세운 적이 있다. 권유를 받고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다. 결단을 내리며 정치 입문 30년의 대계를 설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