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기로 착혈하던 고문귀
하판락,가와모토 마사오
(河判洛,河本判洛,河本正夫,1912년~ 2003년) 일제 강점기 고등계 경찰,경상남도 진주 지역 유지 출신
일제강점기 경남 고등 친일경찰 3총사중 하나로 최고의 고문 경찰
일본 경찰보다 더 악랄했던 조선 순사 '하판락'
1930년 진주 고등보통학교 졸업한 후 순사 시험 합격,사천,부산 경찰서에서 근무
주로 경남 지역 독립 운동가 색출 또는,신사참배 거부자들을 대거 잡아 불구로 만들거나 고문으로 옥사케 함.
(이로 인해 고문귀,고문왕의 별명이 붙음)
1930년 신사 참배 거부 기독교인 수십명 집단 고문
1943년 친우회 불온 전단사건 여경수,이광우 등 7~8명 고문
몸에 화롯불에 달궈진 쇠 젓가락으로 지지기,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추가룻물 붓기
계속 피를 뽑아내는 착혈 고문,고문 당하는걸 바로 옆에서 지켜 보게 하기
전기 고문,물 고문,다리고문으로 다리 못 쓰게 만들기 등
이때 여경수,이미경등 3인 옥사(나머지는 불구)
그를 만나면 직이뿌라.그는 사람이 아니다. 인두껍을 쓴 짐승이다
- 독립운동 활동 인정 증거수집을 위해 하판락을 만나러 가는 아들에게 이광우 선생이- |
하판락 광복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이승만,미군정의 비호와 반민특위 해산으로 인해 석방....계속 경찰 재직,
석방 후 그는 고향인 명석면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부산에 거주하며 사업가로 변신했는데 재력을 바탕으로 제도정치권에 진입하고자 여러 차례 애를 썼다. 1956년 제2대 경남도의원 선거에 하판락은 자신이 거주하고 있던 부산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인 명석면으로 돌아와 진양군 제1선거구에 입후보하여 출마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막강한 하씨 문중의 영향력과 선거운동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하판락을 기억하고 있던 면민들과 유권자들은 그를 낙선시켰다. 하지만 그 후에도 꿈을 버리지 않고 있던 하판락은 부산시의원 선거에도 뜻을 두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그는 방향을 완전히 바꿔 신용금고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해 금융업자로 변신하는 한편,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로 자리잡는데 성공했다. 이 돈으로 그는 고향에 돌아와 명석면 청사를 신축하는데 기금을 희사하거나 크고 작은 고향 일에 기부금을 내는 등 고향을 빛낸 출향 인사로 변신했고, 부산에서는 어버이날에 부산시장의 표창을 받는 등 노인복지 공로자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1] 하판락의 친일행적이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은 독립투사
이광우의 증언이었다.
이광우이 하판락으로부터 고문당하고 투옥되었으며, 이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을 불구자로 고통받고 있는 사실이 정부로부터 인정되어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상을 받으면서 하판락의 죄상이 다시 드러난 것이다. 하판락의 친일죄상과 고문 사실이 하나 둘 재조명되면서 국민적인 공분과 비난여론이 비등하자 노령의 하판락은 2000년 1월 17일 <대한매일>과의 인터뷰를 통해 “일제 경찰 간부를 지낸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며 마지못해 잘못을 시인하기도 했다. 2000년 12월 하판락의 고향인 현 진주시 명석면에서 발간된 <명석면사>에서는 그의 집안인 진주 하씨 문중의 반발로 하판락의 친일 죄상이 모조리 삭제되는 ‘
분서갱유’를 당했다. 명석면사를 쓴 김경현은 하씨문중이 하씨 집성촌인 명석면 관지리 마을회관으로 김씨를 불러‘무슨 근거로 그렇게 썼냐. 근거를 대라. 하판락은 단지 경찰이었다. 고등계 형사가 아니다.‘광주놈이라 경상도를 저렇게 쓴다’,‘외지인 주제에 지역사정을 뭘 안다고 그렇게 막 쓰냐’고 비난했고 결국 하판락 부분은 삭제되었으나, 김경현은 자신의 마지막 양심을 편찬후기 형식으로 끼워넣었다.
“명성면 출신자 중에 반민특위 관련자에 대해서는 면사편찬위의 결의로 삭제했다.” 진주 하씨 문중은 뒤늦게 ‘죽일 놈 살릴 놈’했지만 책은 인쇄가 끝난 뒤였다.
[4] [5]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서
친일파 708인 명단을 발표했을 때 명단에 든 인물들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경찰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003년 9월 11일 하판락은 향년 91세로 천수를 다 누리고 그 악명높았던 일생을 부산에서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