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다른 글의 표창원씨의 발언처럼 UN사무총장이라는 자리가 반기문 개인의 능력으로 쟁취된 것이 아님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 자리까지 가게 된 것이 온전히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들어 준 것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니, 노무현 전 대통령의 덕을 봤다고 말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겁니다.
다만 반기문 사무총장은 기본적으로 관료출신입니다.
비록 그가 참여정부에서 장관직을 역임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의 정치 성향도 참여정부나 노 대통령과 같을 것이라 속단할 수는 없는 일이고, 다르다 해서 비난할 일도 아닙니다.
제 보기엔 (그간의 처세와 발언 등을 보건대) 반기문 사무총장은 기본적으로 관료적 처세가 몸에 밴 보수적 성향을 가진 분 같습니다. 굳이 당을 따진다면 새누리당이나 안철수 신당에 더 어울리는 사람 같습니다.
아무튼 그가 기본적으로 관료 출신이라는 점, 또 그의 정치 성향은 그 사람의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 속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번 그의 위안부 협상 지지 발언은 좀 이례적이라 생각하고 아쉬움과 실망스러움을 느낍니다.
이번 협상 결과는 국내에서 큰 논란에 싸여있는 민감한 사안입니다.
그간 국내에서 이슈가 된 수많은 논란거리가 있었음에도, 그런 문제들에 대한 반 총장의 반응은 거의 대부분 침묵이었습니다. 이런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뜨뜻미지근한 처세가 그간 반 총장이 보여준 대부분의 모습이었고, 그런 태도에 대해 어떤 분들은 실망스럽다 성토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UN사무총장이라는 자리가 만드는 진중함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매우 놀랍게도 이번 협상 결과에 대해서는 그가 그간의 행동 양식을 깨고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드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는 그간 - 언뜻언뜻 보이는 그의 보수적 성향이 썩 맘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 그가 보여준 이런 신중한 모습이 현재 그의 자리에서는 더 필요한 것이라 여겼던 제게는 매우 이례적이고 놀랍게 여겨집니다.
더구나 그의 몸에 배인 직업 관료 특유의 처세 방식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렇죠.
왜 그랬을까요?
왜 반기문 총장이 그간 자신이 고집해왔던 행동 양식을 깨고 이례적인 모습을 보였을까요?
저는 두 가지 정도의 이유로 추론해 봅니다.
하나는 (많은 분들이 예상하시는 것처럼) 집권 여당의 대선 후보 또는 유력한 정치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포석.
또 하나는 그 누구보다도 이번 한일 간의 협상 결과(사실 결과보다는 타결 자체)를 지지하는 미국의 입장을 대변한 것. 아시다시피 사실상 UN사무총장은 표면상의 명예로움과는 달리 수시로 미국의 입김에 흔들리고 때론 가장 적극적으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요.
아무튼 반 총장이 이런 이례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금번 그의 발언은 문제의 중요성과 본질을 놓친 경솔하고 실망스러운 발언입니다.
우리 함께 협상 결과를 판단하는 기준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번 협상 결과를 평가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한일관계, 한미일의 공조체제, 더나아가 중국까지 포함하는 동북아 국제정세 등 거창한 내용들이 평가를 가득 채웁니다. 물론 그런 것들 모두 매우 중요합니다. 그건 익히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번 협상의 결과를 판단하는 기준의 중심에는 마땅히 직접 성노예로 고초를 겪은 할머니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 분들은 우리나라가 온전했다면 당연히 지켜드렸어야 할 우리 국민입니다. 그걸 나라가 힘을 잃어 지켜주지 못한 겁니다. 나라가 못나서 고초를 겪은 분들이니, 이제 번듯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그 분들을 보듬고 아쉬운대로라도 최대한의 보상을 드려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나라를 잃었을 때 나라를 되찾기 위해 애쓴 독립투사 분들을 지금 우리가 기념하고 기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럼 할머니들에게 이 나라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보상이 뭘까요?
그분들이 항상 주장하는 것이 뭡니까? 돈 100억? 아니죠. 명예입니다. 진심어린 사과입니다.
그걸 받아내기 위해 25년간 매주 그 자리에 계셨던 겁니다.
혹자는 (일본은 원래 진심으로 사과할 맘이 없는 놈들이니 우리 입장만 고집하다 보면) 협상도 못 해보고 할머니들 다 돌아가시면 어떻게 할거냐 말합니다. 물론 그건 불행한 일이죠. 하지만 그렇다해서 서둘러 협상 끝내고 이런 결과를 내는 걸 할머니들이 바랄까요?
그게 아니란 것은 이번 협상 결과를 접한 할머니들의 반응만으로도 너무나 분명하죠.
이번 협상 결과는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군 위안부(매춘부)를 동원하는 과정에서 좀 문제가 있었고 그 점에 대해 도의적으로 미안함을 느낀다는 일본의 주장을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겁니다.
할머니들께 명예를 되찾아 드려도 모자랄 판에 그 분들을 이 정부가, 이 나라가 한번 더 버린 것이고 이는 절대 해서는 안될 아주 파렴치한 짓입니다.
미국이니, 일본이니 국제 정세가 어떠니... 다 중요하죠.
하지만 나라가 힘이 없어 그 국민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그 분들의 일평생을 지옥같은 삶에 내던져지게 했습니다. 그런데 '국익'을 내세워 그 분들을 또다시 내던져 버리다니요. 그것도 우리 정부가 앞장서서...
이건 스스로 나라로서의 존재 가치를 부정한 것입니다. 이런 짓을 자행하면서도 '국격' 운운하는 것이 가소롭고 한심합니다. 국격이나 애국심은 태극기 달고 국민의례 한다고 생기는 게 아닙니다.
국민들 삶을 행복하게 해주고 국가의 행위에 대해 그 구성원으로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해주면 저절로 생기는 겁니다.
반 총장이 어떤 이념을 갖고 있든, 그의 행보가 어떤 이유가 있든 그건 제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이런 문제의 중요성과 본질을 망각하고 경솔한 발언을 쏟아낸 것에 대해서는 매우 실망스럽습니다. 그는 지금 역사 앞에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임을 스스로 깨닫길 바랍니다.